어쩌면 오늘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비슷한 하루였을지 모릅니다. 하루의 끝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고 싶어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서는 갑자기 영화가 시작됩니다.
오늘 낮에 동료와 대화하다 무심코 뱉었던 사소한 말실수 하나, 며칠 전 상사가 지었던 그 알 수 없는 표정의 의미, 심지어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몇 년 전의 아픈 기억까지. 스크린은 하나인데 수십 개의 영상이 한꺼번에 재생되는 것처럼 혼란스럽습니다. 제멋대로 상영되는 이 영화를 이제 그만 멈추고 싶지만, 정지 버튼이 달린 리모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깜깜한 방 안에서 눈을 감은 채,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끝없는 소란을 속수무책으로 견뎌내는 것뿐입니다.
고요한 아침, 가만히 앉아 커피 한 잔의 온기를 느끼려 해도 마음은 좀처럼 현재에 머물지 못합니다. 찻잔의 따스함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내일 회의에 대한 걱정이 더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미 지나가 버려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어제의 일을 곱씹으며 후회하고 자책합니다. 몸은 분명 지금, 여기에 있는데 마음만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지치지 않는 시간 여행자 같습니다. 그 여행이 즐겁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대부분은 걱정과 불안, 후회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을 가득 짊어지고 떠나는 고된 순례길입니다.
하나의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그 생각은 마치 자석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생각들을 줄줄이 끌어당깁니다. 산 정상에서 굴러 내리기 시작한 작은 눈송이가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눈을 집어삼키며 거대한 눈덩이가 되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걱정 하나가 어느새 내 삶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불안 덩어리로 자라나기도 합니다.
‘내가 이걸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작은 의문은 어느새 ‘나는 역시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야’라는 낙인으로 변하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은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라는 깊은 절망감으로 순식간에 번져나갑니다.
이 거대한 생각의 흐름에 한번 휩쓸리면, 마치 거센 급류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어느새 생각과 나 자신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우울한 감정이 진짜 나의 전부인 것 같고, 생각이 속삭이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곧 닥쳐올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의 노예가 되어 하루의 소중한 에너지를 모두 빼앗기고 맙니다. 창밖에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9월인데, 내 마음은 여전히 한여름의 폭풍우 속에 갇혀 있는 기분. 이제는 정말 이 지긋지긋한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 때입니다.
내 머릿속, 시끄러운 시장 한복판
마치 텅 빈 방에 나 혼자 조용히 있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 갑자기 문을 활짝 열어보니 그 안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떠들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특별한 일이 없는 평범한 날에도 우리 머릿속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일을 큰 소리로 외치며 후회를 부추깁니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지!” 하고 소리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속삭이며 불안을 조장합니다. “분명히 안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라며 겁을 줍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로 나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지적질을 해댑니다. “넌 그것밖에 안 돼.”, “또 실수했구나, 한심하긴.” 이처럼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여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이 혼란스러운 소란 속에서 차분하고 지혜로운 ‘진짜 내 목소리’를 듣기란, 마치 시끄러운 시장 한복판에서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 시끄러운 시장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수많은 목소리 중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고 무섭기만 합니다.
이 모든 목소리를 제발 좀 잠재우고 싶지만, 내가 애를 쓸수록 소리는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생각들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치 날씨처럼, 내가 통제할 수 없이 저절로 피어오르는 현상에 가깝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을 우리가 막을 수 없는 것처럼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어쩌면 꿈속에서까지 생각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엄청난 양의 생각들 대부분은 사실 어제 했던 생각의 지루한 반복이거나, 영양가 없는 잡담, 혹은 완전히 비논리적인 것들입니다.
진짜 문제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 모든 생각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어떤 사람이 스쳐 지나가며 혼잣말을 했는데, 그 말이 마치 나에게 욕을 한 것처럼 들려서 하루 종일 기분을 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그 사람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말을 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우리는 모든 생각의 멱살을 잡고 ‘이게 무슨 뜻이냐’며 따져 묻습니다.
머릿속의 소음이 너무 클 때, 우리는 종종 그 소음과 나를 동일시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걱정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본래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실패할 것 같다’는 하나의 생각이 드는 것을, ‘나는 실패자’라는 정체성으로 받아들여 버립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시끄러운 시장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 시장의 소음도, 상인도, 물건도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그 시장에 잠시 서서 소음을 듣고 있는 관찰자일 뿐입니다. 시장은 원래 시끄러울 수 있지만, 당신은 언제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올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연습은 바로 이 사실을 부드럽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 내 머릿속이 지금 시장처럼 시끄럽구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저마다 떠들고 있네.’ 하고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저 이 사실을 판단 없이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아주 작은, 그러나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시끄러운 소음과 ‘그것을 듣고 있는 나’ 사이에 아주 작은 틈, 즉 공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틈이 바로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며, 모든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 열차
하나의 작은 걱정이 어떻게 당신의 온 마음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불안으로 변하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 있나요?
그 과정은 마치 어느 작은 시골 기차역에서 ‘생각’이라는 이름의 기관차 하나가 출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관차는 여러 역을 거치며 수많은 객차를 줄줄이 달고 폭주하게 됩니다.
‘내일 중요한 발표를 잘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출발 신호입니다. 이 생각 하나는 아주 작고 평범해 보입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기관차는 멈추지 않고 이내 다음 역에 도착합니다. 그 역의 이름은 ‘만약에’ 역입니다. ‘만약에 내가 실수하면 어떡하지?’ 걱정이라는 이름의 낡은 객차 하나가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기관차 뒤에 연결됩니다.
열차는 다시 출발하고, 곧 다음 역에 도착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무능하다고 생각할 거야.’ 이번에는 수치심이라는 차가운 쇠로 만들어진 객차 하나가 또 연결됩니다.
열차는 점점 더 길어지고,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집니다. ‘나는 왜 이렇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을까?’ 자책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화물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연결됩니다. 이제 열차는 언덕을 내려가듯 가속도가 붙습니다.
‘결국 나는 이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실패자로 남게 될 거야.’ 절망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객차까지 연결되고 나면, 이 ‘걱정 특급 열차’는 제동장치가 고장 난 채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분명 처음에는 그저 ‘발표’에 대한 작은 걱정이었을 뿐인데, 어느새 ‘나의 존재 가치’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폭주하는 열차의 가장 마지막 칸에 갇힌 채, 공포에 떨며 그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뿐입니다. 열차를 멈추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멈추려고 발버둥 칠수록 열차는 더 거세게 흔들리고 불안감만 증폭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끌고 가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져준 ‘만약에’라는 작은 석탄 조각을 연료 삼아, 걱정 열차는 멈추지 않고 밤새도록 달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폭주하는 열차가 아닙니다. 심지어 열차에 갇힌 승객도 아닙니다. 당신은 본래 그저 선로 옆에 가만히 서서,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는 열차가 나타날 때마다 너무나 익숙하게, 무의식적으로 뛰어올라 탔을 뿐입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할 연습은, 열차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번에는 타지 않고 그저 플랫폼에 서서 보내주는 것입니다.
‘아, 걱정 열차가 또 오네.’
‘오늘도 어김없이 출발하려고 하는구나.’
‘저기에는 불안이라는 객차도 달려 있고, 수치심이라는 객차도 어김없이 매달려 있네.’
이렇게 열차를 그저 담담하게 바라봐 주세요. 마치 기차 시간표를 확인하는 역무원처럼요. 열차에 타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더 이상 열차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열차는 당신이라는 중요한 승객을 태우지 못하면, 곧 연료가 떨어져 힘을 잃고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만약에’라는 이름의 감옥
우리의 마음을 가장 교묘하고 끈질기게 힘들게 하는 단어 중 하나는 아마 ‘만약에(What if)’일 겁니다.
‘만약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쯤 어땠을까?’
‘만약 앞으로 나에게 끔찍하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만약에’라는 이 두 글자는 우리를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둡니다. 이 감옥은 너무나 정교하게 지어져서, 우리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감옥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바깥의 실제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최악의 장면들만이 감옥의 벽에 섬뜩한 그림처럼 그려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벽에 그려진 그림을 실제라고 굳게 믿으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느끼고, 이미 지나가 버린 일 때문에 오늘의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과거를 향한 ‘만약에’는 우리를 깊은 무기력의 늪에 빠뜨립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 버려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면서도, 마음은 계속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다른 결말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 상상은 우리에게 한 줌의 위안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소중한 힘을 앗아갈 뿐입니다.
미래를 향한 ‘만약에’는 우리를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리게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온갖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쉴 새 없이 써 내려갑니다. 마치 재난 영화의 작가가 된 것처럼요. 수십, 수백 가지의 걱정을 미리 만들어내고, 그 상상 속의 무게에 짓눌려 숨 막혀 합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했던 수많은 ‘만약에’ 시나리오 중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결국 우리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걱정으로, 유일하게 실재하는 소중한 현재라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만약에’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비상 열쇠는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만약에’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마다, 의식적으로 그리고 부드럽게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 내가 또 만약에 감옥에 갇히려 하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열쇠입니다. 자신이 감옥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구체적이고 작은 현실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이것이 두 번째 열쇠입니다. 예를 들어, 발바닥이 땅에 단단히 닿아있는 느낌. 의자가 엉덩이를 받쳐주는 묵직한 감각. 숨이 코를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 손에 들고 있는 컵의 따뜻하고 매끄러운 감촉.
‘만약에’라는 생각은 실체가 없는 허상입니다. 그래서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감각은 명백한 실재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의 감각이라는 닻을 내릴 때, ‘만약에’라는 감옥의 문은 저절로 스르르 열립니다. 당신은 언제든 그 감옥에서 유유히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감정은 손님, 나는 주인
슬픔, 분노, 불안, 두려움… 이런 불편한 감정들이 예고 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반응하나요?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 불청객들을 가능한 한 빨리 쫓아내고 싶어 안달합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없는 척 외면하거나, “저리 가!”라고 소리치며 억지로 밀어내려고 온 힘을 씁니다. 혹은 다른 즐거운 일에 몰두하며 그 존재를 잊으려 애씁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감정이라는 손님은 더 거세게 문을 두드리고, 더 오래 집안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나 여기 있다고! 제발 나 좀 보라고!” 하면서 온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치면서 말입니다.
감정은 우리가 억누르거나 없애려고 저항할수록 오히려 더 강해지는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물속에 고무공을 억지로 눌러 넣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힘을 주어 누르면 누를수록, 손을 놓는 순간 공은 더 강한 힘으로 물 위로 튀어 오릅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감정과 싸우거나 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감정을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처럼 대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마음이라는 집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감정은 날씨처럼, 혹은 우편배달부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입니다. 어떤 손님이 찾아오든, 지혜로운 주인은 당황하지 않고 주인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슬픔’이라는 손님이 찾아왔다고 상상해봅시다. 문을 열어보니 그 손님은 온몸이 축 처져 있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문을 쾅 닫는 대신, 조용히 문을 열고 이렇게 말해보는 겁니다. “슬픔아, 왔구나. 어서 와. 잠시 들어와 앉으렴.”
그리고 슬픔이 내 몸 어디에 머무는지 가만히 느껴보세요. 가슴 한가운데가 돌덩이처럼 답답한지, 목구멍이 꽉 메어 오는지, 눈가가 뜨거워지는지. 그저 손님이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따뜻한 공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손님을 비난하거나, “넌 왜 맨날 찾아와!”라고 따져 묻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 갈 거냐고 눈치를 주거나 재촉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네가 머무는 동안,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곁을 지켜줄 뿐입니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이렇게 손님을 환대해주면 감정이라는 손님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시당하지 않고 존중받았다고 느끼면, 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이 조용히 일어나 떠나갑니다. 떠날 때는 오히려 작은 선물을 남겨두고 가기도 합니다.
기억하세요. 감정은 나 자신이 아닙니다. 감정은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 하나의 에너지 파동일 뿐입니다. 당신은 그 감정을 담는 거대하고 안전한 그릇이며, 이 마음의 집을 지키는 변함없는 주인입니다. 어떤 손님이 찾아와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생각과 나 사이에 작은 틈 만들기
마치 유리창에 코를 바짝 붙이고 바깥을 보면, 유리창에 묻은 작은 먼지나 빗물 자국만 크게 보이고 그 너머의 광활한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에 깊이 빠져 있을 때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생각과 나를 너무나 가깝게, 거의 한 몸처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 생각 자체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불안과 걱정이 곧 닥쳐올 진짜 현실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연습은, 그 유리창에서 딱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유리창에 묻어있던 먼지와, 그 너머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동시에,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나’ 사이에 작은 틈, 즉 심리적 공간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 귀중한 틈을 만드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살짝 이름을 붙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 알아차리기’ 또는 ‘이름 붙이기(Labeling)’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번에도 실패할 거야’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 그 내용에 빠져드는 대신 이렇게 해보는 겁니다. ‘아, 내 마음이 지금 걱정하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네.’ 혹은 더 간단하게, ‘이건 비판하는 생각이구나.’, ‘이건 과거를 후회하는 생각이네.’
마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이것은 뉴스구나’, ‘이것은 슬픈 사연이구나’ 하고 종류를 파악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슬픈 사연을 들으며 감정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사연이 ‘내 이야기’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내 마음이라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여기고, 나와 분리하는 것입니다.
생각에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이름을 붙여주면, 우리는 그 생각과 즉각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게 됩니다. 생각이라는 급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신, 강둑에 서서 그것이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관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을 하나의 ‘정신적 사건(mental event)’으로 객관화하는 과정입니다.
‘나는 실패자야’라는 생각의 내용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과, ‘아, “나는 실패자야”라고 말하는 생각이 지금 내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구나’라고 한 걸음 떨어져서 알아차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의 경험입니다.
전자는 생각과 내가 한 덩어리가 되어 고통받는 상태입니다. 후자는 생각과 나 사이에 분명한 공간이 존재하며, 내가 주도권을 쥔 상태입니다.
이 공간 안에서 우리에게는 ‘선택의 힘’이 생깁니다. 그 생각을 계속 따라가며 더 큰 이야기로 부풀릴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하늘의 구름처럼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생각을 억지로 멈추거나 없애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생각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강물을 막으려고 댐을 쌓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불가능하며 더 큰 홍수를 유발할 뿐입니다), 강둑에 편안히 앉아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 작은 틈을 만드는 연습을 반복할수록, 당신은 더 이상 생각의 급류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생각의 주인이 되어, 평온하게 강물의 흐름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떠다니는 구름처럼, 그냥 바라보기
지금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세요. 맑은 날이라면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다닐 것이고, 흐린 날이라면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을 겁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종류의 구름이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어떤 날은 솜사탕처럼 하얗고 예쁜 뭉게구름이 평화롭게 지나가고, 어떤 날은 금방이라도 거대한 폭풍우를 쏟아낼 듯한 시커먼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구름의 모양이나 색깔이 어떻든,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하늘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먹구름 때문에 더러워지거나 상처 입지 않습니다. 하늘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 있으며, 모든 구름이 자유롭게 왔다가 갈 수 있도록 너른 공간을 허락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 즉 순수한 의식(awareness)이 바로 저 하늘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수많은 생각과 감정은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과 같습니다.
기분 좋은 생각, 행복한 감정이라는 뭉게구름이 떠다닐 때도 있고, 걱정, 불안, 슬픔, 분노라는 먹구름이 거세게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종종 먹구름이 몰려오면 그 먹구름이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잿빛으로 변한 것 같고, 이 어둠과 축축함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그 먹구름을 쫓아내려고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씁니다.
입으로 바람을 불어 흩어버리려 하고, 거대한 손이 있다면 밀어내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우리가 발버둥 치며 애를 쓸수록 먹구름은 더 짙어지고, 더 오래 머무는 것만 같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당신은 구름이 아니라, 그 구름을 담고 있는 거대한 하늘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생각과 감정을 담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넓고 평온한 존재입니다.
구름은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 영원히 하늘에 머무는 구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리 짙고 거대한 먹구름이라도 결국에는 바람에 흩어져 제 갈 길을 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먹구름 뒤에는 언제나 그랬듯, 변함없이 푸르고 맑은 본래의 하늘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생각이라는 구름과 싸우거나 도망치려 하지 마세요. 그저 하늘이 되어, 구름이 떠다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가만히 바라봐 주세요.
‘아, 걱정이라는 먹구름이 몰려왔구나.’
‘오늘은 모양이 꽤 짙고 크네. 바람의 속도가 느려서 천천히 흘러가는구나.’
‘저쪽에서는 분노라는 번개를 품은 구름도 다가오고 있네.’
이렇게 구름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거나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마치 기상학자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는 마음챙김(mindfulness)의 핵심입니다.
당신은 하늘입니다. 어떤 구름이 몰려와도 당신의 푸르고 광활한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기억할 때, 우리는 삶의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몸으로 돌아오는 연습
생각의 소용돌이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종종 몸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마치 목 위로 머리만 동동 떠다니는 유령처럼, 오직 생각의 세계 속을 끝없이 헤매고 다닙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오가는 이 고된 생각의 여행에 우리의 소중한 에너지는 모두 소진되어 버립니다. 몸은 지쳐있는데, 머리는 멈추지 않는 공회전 상태가 계속됩니다.
이럴 때, 우리를 혼란스러운 생각의 세계에서 ‘지금, 여기’라는 안전한 현실로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데려다주는 앵커(anchor), 즉 닻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과 ‘감각’입니다.
생각은 빛의 속도로 과거나 미래로 달려갈 수 있지만, 우리의 몸은 언제나 정직하게 현재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은 가장 확실한 현실의 좌표입니다.
머릿속이 너무 시끄럽고 복잡해서 견디기 힘들 때, 당신의 의식을 부드럽게 몸으로 가져와 보세요. 마치 손전등 불빛을 머리에서 발끝으로 옮기듯이요.
가장 쉬우면서도 강력한 방법은 발바닥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두 발바닥이 땅이나 바닥에 어떻게 닿아 있는지 온전히 느껴보세요. 신발이나 양말 속 발의 감각은 어떤가요? 발뒤꿈치, 발의 바깥 날, 그리고 열 개의 발가락 하나하나가 바닥을 누르는 미세한 압력을 느껴보세요. 바닥의 단단함이나 카펫의 부드러움, 차가운지 따뜻한지 그 온도를 느껴보세요. 마치 발바닥으로 숨을 쉬는 것처럼, 모든 의식을 발바닥으로 집중해봅니다.
단 10초만이라도 이렇게 발바닥의 감각에 오롯이 집중하면, 그렇게 시끄럽던 머릿속의 소음이 잠시 멎거나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폭풍우 속에서 빠져나와 몸이라는 안전한 땅으로 착륙하는 것입니다.
손을 사용해볼 수도 있습니다. 두 손을 가만히 비벼서 따뜻하게 만든 다음, 그 따뜻해진 손으로 당신의 얼굴이나 팔, 혹은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보세요. 손바닥의 따뜻한 온기가 피부에 천천히 전해지는 느낌에 모든 주의를 기울여보세요. 이 따뜻함은 우리의 신경계에 ‘너는 지금 안전하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줍니다.
또 다른 강력한 닻은 바로 우리의 ‘호흡’입니다. 호흡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가장 믿음직한 현재의 증거입니다. 숨을 억지로 길게 쉬거나 조절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자연스러운 숨이 코를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숨이 들어올 때 공기가 콧구멍을 스치는 감각, 그리고 배나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움직임. 숨이 나갈 때 다시 서서히 가라앉는 미세한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물론, 집중하는 동안에도 생각은 파도처럼 계속 밀려올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집중을 못하지?’ 하고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아, 생각이 떠올랐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부드럽게 호흡이라는 닻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마치 길을 잃었던 아이가 엄마의 손을 다시 부드럽게 잡는 것처럼, 수백 번이라도 친절하게 돌아오세요.
몸은 우리가 생각의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쉼표 찍기
우리의 삶은 종종 쉼표나 마침표 없이 끝없이 이어진 아주 긴 문장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아침에 알람 소리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지쳐 잠들 때까지, 우리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하나의 생각에서 다음 행동으로, 그 행동에서 또 다른 생각으로 쉴 틈 없이, 숨 가쁘게 달려갑니다. 이렇게 자동 조종 모드로 달리다 보면, 우리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관성의 법칙에 이끌려 가게 됩니다.
특히 생각과 행동의 관계에서 이 자동성은 두드러집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너무나 깊은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불안한 생각이 떠오르면, 우리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최악의 상황을 검색하거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는 불안한 행동을 합니다. 화나는 생각이 떠오르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거나 날카로운 말을 내뱉습니다.
자극(생각)과 반응(행동) 사이에 아무런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면 음료수가 바로 튀어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아주 작지만 강력한 ‘쉼표’ 하나를 찍는 연습을 해보는 겁니다. 생각이 떠오르고, 그에 따라 무언가 행동하기 직전에, 아주 잠깐, 단 1초라도 의식적으로 멈추는 것입니다. 마치 달리다 말고 잠시 숨을 한번 고르는 것처럼요.
이것을 ‘의식적인 멈춤(Mindful Pause)’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운전 중에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어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생각이 들 때, 바로 경적을 울리거나 욕을 내뱉는 대신 아주 잠깐 멈추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해보세요. ‘아, 지금 화가 났구나.’ 그리고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느끼며 심호흡을 한번 합니다. 하나, 둘, 셋.
이 단 3초의 멈춤, 이 작은 쉼표 하나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이 짧고 소중한 순간 동안 우리는 자동적인 반응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생깁니다.
예전처럼 반사적으로 화를 터뜨리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저 사람도 바쁜 일이 있겠지’ 하고 넘어가거나, 그냥 조용히 내 갈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작은 쉼표는 하루 중 언제 어디서든 찍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다가, 문득 걱정이 밀려올 때. 잠깐 멈추고, 의자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거나 창밖의 하늘 색깔을 한번 보세요. 설거지를 하다가, 지난날의 후회가 떠오를 때. 잠깐 멈추고, 손에 닿는 따뜻한 물의 감촉과 비누 거품의 부드러움을 온전히 느껴보세요.
이 작은 쉼표들이 모여, 당신의 삶이라는 긴 문장에 편안한 호흡과 리듬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더 이상 생각에 끌려다니는 자동 항법 장치를 끄고, 당신의 삶이라는 배의 운전대를 다시 굳게 잡게 될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생각에게 이름 붙여주기
우리의 마음속에는 유독 자주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히는, 아주 질긴 단골손님 같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마치 특정 채널만 계속 틀어주는 라디오처럼,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는 늘 부족하고 모자라’라고 속삭이는 냉정한 ‘비판가’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라며 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걱정꾼’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모든 게 다 내 탓이야’라고 말하며 불필요한 죄책감을 짊어지게 하는 ‘죄책감 선수’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해왔기 때문에, 마치 내 진짜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생각의 내용에 너무나 쉽게 설득당하고, 그 말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굳게 믿어버립니다.
이렇게 끈질긴 단골 생각들과 건강한 거리를 두는 아주 재미있고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 생각에게 익살스러운 별명을 붙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이름을 지어주듯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 늘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하는 생각이 나타난다면, ‘깐깐한 김대리’ 혹은 ‘완벽주의 로봇’이라고 이름을 붙여줄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이 나타난다면, ‘걱정 인형’ 혹은 ‘김칫국 드라마 작가’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주면 어떤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까요? 그 생각은 더 이상 나를 압도하는 심각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패턴이 뻔히 보이는 친숙한 캐릭터가 됩니다. 우리는 그 생각과 안전한 거리를 두고 훨씬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부족해, 이번 일도 분명 망칠 거야’라는 생각의 내용에 압도되어 절망하는 대신, ‘어, 또 깐깐한 김대리가 출근했네. 아침부터 잔소리가 심하시군.’ 이라고 피식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이것은 생각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그 생각의 존재를 명확히 인정하고, 그것의 반복되는 패턴을 유머러스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캐릭터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래, 깐깐한 김대리,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잘 알겠어. 늘 나 잘되라고 걱정해서 하는 소리인 거 알아. 고맙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 조언이 별로 필요 없어. 나는 그냥 내 방식대로 한번 편안하게 해볼게.”
이렇게 생각을 하나의 분리된 인격체처럼 대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생각의 내용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생각을 하나의 정보나 조언으로 참고하되, 최종 결정권은 나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을 다룰 수 있는 힘과 유머 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을 가장 자주 괴롭히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오늘, 그 생각에게 재미있고 정감 가는 별명 하나를 선물해 주세요. 그리고 그 캐릭터가 나타날 때마다, 다정하게 인사하며 웃어넘겨 주세요. 이것은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아주 유쾌하고 지혜로운 탈출구가 될 것입니다.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기
끝없는 생각에 끌려다니며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쏘아 올립니다. 첫 번째 화살은 생각으로 인한 고통 그 자체이고, 두 번째 화살은 그런 자신을 비난하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남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또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서 시간을 낭비하다니, 정말 한심해.’
‘정신 좀 차려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나약하게 굴 거야?’
우리는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리는 1차적인 고통에 더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비난하는 2차적인 고통까지 더하게 됩니다.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왜 수영도 제대로 못하냐”고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따뜻하게 내밀어주는 손길입니다.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힘들어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해주나요? 아마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며,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얼마나 힘들었겠어.” 라고 말해줄 겁니다. 섣불리 조언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저 그 친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곁을 지켜줄 겁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해주어야 할 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비(self-compassion)’의 핵심입니다. 생각에 빠져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마치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다정한 눈으로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면, 가슴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이렇게 속삭여 주세요. “많이 불안하구나. 무서웠겠다. 괜찮아, 내가 여기 너와 함께 있어 줄게.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네 편이야.”
과거의 후회로 괴로워하는 나를 발견했다면, 상상 속에서 나 자신을 부드럽게 안아주며 말해주세요. “그때는 그게 너의 최선이었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거야. 이미 지난 일이니 이제 그만 자신을 용서해주자. 괜찮아.”
이것은 결코 자기 합리화나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과 감정에 흔들릴 수 있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인정하고, 지금 이 순간 고통받고 있는 나 자신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보듬어주는 적극적인 치유 행위입니다.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다정함으로 감싸 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유독 엄격하고 가혹한 재판관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이제 그 차가운 재판관의 자리를 내려놓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나의 친구가 되어주세요.
스스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그 어떤 명쾌한 조언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짜 힘을 얻게 됩니다. 다정한 자기 위로가 단단하고 안전한 땅이 되어, 우리가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든든하게 지지해 줄 것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여름 내내 지쳤던 마음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9월입니다. 이제는 당신 자신에게도 그 가을바람처럼 다정하고 너그러워져도 괜찮습니다.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은 당신이 유독 약하거나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반응해온 우리의 뇌와 마음의 습관일 뿐입니다. 낡고 불편한 습관은, 꾸준한 연습을 통해 새롭고 건강한 습관으로 덮어쓸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아주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해 보세요. 생각이 떠오를 때, 그저 ‘아, 생각이구나’하고 알아차려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늘이 수많은 구름을 판단 없이 그저 바라보듯,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저 다정하게 바라봐 주세요. 당신은 잠시 머물다 가는 구름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품어내는 넓고 평온한 하늘이니까요.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세상은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달라지기 시작할 겁니다. 더 이상 생각의 노예가 아닌, 당신 삶의 다정한 주인이 되어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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