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난 안돼”라는 부정적인 혼잣말 멈추기

또 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마음 한구석에서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릅니다.

애써 무언가를 해보려던 마음이 무색하게,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그 느낌. 크게 넘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작은 돌멩이에 발이 걸렸을 뿐인데,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야심 차게 시작했던 아침 운동을 하루 빼먹었을 때. 회의 시간에 더듬거리며 말을 겨우 마쳤을 때. 새로 사귄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에 한참 답이 없을 때.

바로 그 순간, 어김없이 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역시 난 안돼.’

그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해서, 때로는 내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곁에 있었던 낡은 라디오처럼,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항상 같은 말을 반복하죠.

그러면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방금 전까지 무언가를 해보려 했던 의지는 풍선에 바람 빠지듯 사라져 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잘 해내는 것 같은데, 나만 유독 작은 실패에도 크게 휘청이는 것 같아 서글퍼집니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그 다독임조차 공허한 메아리처럼 흩어집니다.

‘역시 난 안돼’라는 네 글자가 만들어낸 단단한 벽 앞에서, 모든 긍정의 말들은 힘을 잃고 맙니다.

마음속에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아마 아주 오래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순간부터였을 겁니다.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되려 꾸중을 들었던 날. 용기 내어 나섰다가 비웃음을 샀던 날.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수많은 날들.

그런 경험들이 마음속에 작은 생채기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 생채기 위에 ‘역시 난 안돼’라는 이름의 딱지가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얇은 딱지였을 겁니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이 반복될수록 딱지는 점점 더 두꺼워지고 단단해졌습니다.

이제 그 딱지는 너무 두꺼워져서, 원래 그 자리에 어떤 상처가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렸습니다. 그저 무언가 잘못될 때마다 반사적으로 그 딱지를 만지며 ‘거봐, 이럴 줄 알았어’ 하고 안도하는 이상한 버릇만 남게 된 겁니다.

그 목소리는 당신을 지키려는 신호입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 목소리는 사실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타난 것에 가깝습니다.

더 큰 실망과 상처를 받기 전에, 미리 기대치를 낮춰 마음의 충격을 줄이려는 나름의 방어 장치인 셈이죠.

마치 뜨거운 주전자에 손을 데인 아이가 다음부터는 주전자 근처에만 가도 몸을 사리는 것과 같습니다. ‘역시 난 안돼’라는 생각은, 과거의 아픈 경험 때문에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보내는 서툰 경고 신호입니다.

하지만 이 보호 장치는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이제는 필요 없는 상황에서도 요란하게 경보를 울립니다. 뜨겁지 않은 주전자 앞에서도, 심지어는 예쁜 찻잔 앞에서도 경고음을 울리며 당신을 뒷걸음질 치게 만듭니다.

당신을 지키려던 좋은 의도가, 도리어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머릿속의 작은 재판관

우리 마음속에는 저마다 작은 재판관이 한 명씩 살고 있습니다. 이 재판관은 아주 엄격하고 냉정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끊임없이 판결을 내립니다.

그리고 가장 자주 내리는 판결이 바로 ‘유죄’입니다.

‘너는 게을렀다, 유죄.’

‘너는 실수를 저질렀다, 유죄.’

‘너는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 유죄.’

이 재판관은 아주 작은 흠결도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당신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 재판관의 목소리는 너무나 크고 단호해서, 우리는 그 판결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믿어버립니다. 변호할 기회도, 항소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읊조리게 되는 것이죠.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역시 저는 안되나 봅니다.’

실패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법

‘역시 난 안돼’라는 생각은 세상을 보는 특별한 안경과도 같습니다. 이 안경을 쓰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나의 부족함과 실패를 증명하는 증거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약속을 취소하면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서 그럴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뽑히지 않으면 ‘역시 나는 능력이 부족해’라고 결론 내립니다.

세상은 그저 수많은 우연과 다양한 이유로 돌아가고 있을 뿐인데도, 실패의 안경은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해석하게 만듭니다.

이 안경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한번 쓰면 벗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입니다.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그것이 세상의 진짜 모습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안경 없이 볼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과 희망들은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증거를 모으는 편파적인 탐정

우리 마음속에는 재판관뿐만 아니라 아주 편파적인 탐정도 한 명 살고 있습니다. 이 탐정의 유일한 임무는 ‘나는 안되는 사람이다’라는 가설을 증명할 증거를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탐정은 당신이 잘 해낸 아홉 가지 일은 그냥 지나치고, 실수한 한 가지 일에만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당신을 향한 수많은 칭찬과 격려는 못 들은 척하면서, 스치듯 지나간 작은 비판 하나를 밤새도록 곱씹게 만듭니다.

마치 자석처럼, 오직 실패와 관련된 증거들만 착착 달라붙습니다. 그렇게 수집된 증거들은 아주 두꺼운 사건 파일이 되어 머릿속 재판관에게 제출됩니다.

그리고 재판관은 그 파일들을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죠. “이것 봐. 네가 안된다는 증거가 이렇게나 많지 않으냐.”

싸우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

그렇다면 이 목소리, 이 재판관, 이 탐정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없애버리려고 싸웁니다. 긍정적인 말을 억지로 외치고,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싸우려고 할수록 그 목소리는 더 크고 집요해집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것과 같습니다. 잠시 싸움을 멈추고, 그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려 퍼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건 어떨까요?

‘아, 또 그 생각이 찾아왔구나. 그 재판관이 또 판결을 내리고 있구나.’ 하고, 마치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겁니다.

그 생각 자체를 없애려 하지 않고, 그저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라고 알아차려주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생각과 나 자신을 분리하는 첫걸음입니다.

나는 그 생각이 아니라, 그 생각을 ‘알아차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생각의 지배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그래도’를 찾아보기

‘역시 난 안돼’라는 생각이 마음을 온통 뒤덮을 때, 거창한 반박은 필요 없습니다. 그 단단한 벽에 작은 틈을 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 틈을 만드는 마법 같은 단어가 바로 ‘그래도’입니다.

‘오늘 운동을 빼먹었어. 역시 난 의지가 약해.’ 라는 생각이 들 때, 문장 끝에 작은 ‘그래도’를 붙여보는 겁니다.

‘…그래도 어제는 30분이나 걸었잖아.’

‘…그래도 운동복을 챙겨놓기까지는 했네.’

‘…그래도 내일 다시 시작하면 되지.’

이 작은 ‘그래도’는 완벽한 실패라는 결론에 균열을 냅니다. 흑백으로만 보이던 세상에 아주 작은 색깔 점 하나를 찍는 것과 같습니다.

이 연습은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마법이 아닙니다. 100%의 실패는 없다는 사실을, 그 안에 아주 작은 노력과 과정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알려주는 다정한 과정입니다.

마음에도 쉼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쉬지 않고 달려가는 경주마와 같습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고, 잘 해내야 한다는 채찍질 속에서 지쳐갑니다.

‘역시 난 안돼’라는 생각은, 어쩌면 이만 쉬고 싶다는 마음의 비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마음의 쉼표를 찍어주세요. 거창한 휴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5분. 좋아하는 음악 한 곡을 눈을 감고 오롯이 감상하는 3분. 잠시 자리에 앉아 코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가만히 느껴보는 1분.

이런 짧은 쉼표의 시간 동안, 우리는 머릿속의 시끄러운 재판관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판단과 평가가 없는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다시 숨 쉴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괜찮다,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무언의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네는 시간입니다.

잘한 일 대신 ‘애쓴 나’를 기록하기

우리는 보통 하루를 돌아보며 ‘무엇을 이뤘는가’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는 오늘 하루도 헛되이 보냈구나. 역시 난 안돼’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습니다.

오늘부터는 자기 전에 ‘잘한 일’ 대신 ‘애쓴 나’를 기록해보는 건 어떨까요?

거창한 성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었지만 ‘애써’ 출근 준비를 한 나. 하기 싫은 전화를 ‘애써’ 먼저 걸었던 나. 복잡한 마음에 힘들었지만 ‘애써’ 하루를 버텨낸 나.

결과가 아닌 과정에, 성과가 아닌 노력에 초점을 맞추는 연습입니다. 이렇게 나의 애씀을 하나씩 기록하다 보면, 결과와 상관없이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순간에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조금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겁니다.

마음의 흙을 갈아엎는 일

‘역시 난 안돼’라는 생각은 척박하고 돌이 많은 땅과 같습니다. 그런 땅에서는 어떤 희망의 씨앗을 심어도 쉽게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씨앗을 심기 전에, 먼저 마음의 흙을 부드럽게 갈아엎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조금 더 친절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그 작업입니다. 친한 친구가 비슷한 일로 속상해할 때, 우리는 뭐라고 말해줄까요?

“그것 봐, 너는 안된다고 했잖아”라고 말하는 대신,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너는 최선을 다했잖아. 너무 자책하지 마”라고 말해줄 겁니다.

바로 그 다정한 목소리를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어색하고 닭살이 돋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이라도 의식적으로 나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주세요.

“오늘 하루도 애썼다, 지영아.” “실수 좀 하면 어때, 그럴 수 있지.”

이 다정한 말들이 돌멩이 같던 마음의 흙을 조금씩 부드럽게 만들어 줄 겁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일은, 굽은 길을 곧게 펴는 것과 같아서 많은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시 난 안돼’라는 생각이 또다시 고개를 들 때, 너무 미워하거나 쫓아내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저 ‘아, 또 왔구나. 나를 지켜주려던 낡은 습관이 또 나타났네’ 하고 알아차려 주세요.

그리고 아주 작은 ‘그래도’를 찾아보고, 잠시 숨을 고르고, 애쓴 나를 토닥여주면 됩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실패 앞에서 주저앉아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넘어진 자신을 다정하게 일으켜 세워주는 법을 배우는 중일 뿐입니다.

먼지 묻은 무릎을 툭툭 털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작은 힘을 기르는 여정. 그 여정에서 당신의 속도는 당신에게 꼭 맞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속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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