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만 해’ 대신 ‘하고 싶어’라는 마음을 찾는 여정

아침에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마음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나요?

‘일어나야 해.’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이 명령 같은 말. 몸은 아직 이불의 포근함 속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오늘 해치워야 할 일들의 목록을 바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꺼진 기계를 억지로 다시 켜는 것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합니다. 커피 한 잔은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을 쫓기 위해 마십니다. 밥 한 끼는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일을 할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수많은 ‘해야만 하는 일’들로 촘촘히 짜여 있습니다.

출근해야 하고, 보고서를 마감해야 하고, 회의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저녁에는 밀린 집안일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해내고 잠자리에 누울 때면, 안도감보다는 거대한 공허함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바쁘게 살았는데,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계속해서 쫓기듯 달려왔는데, 정작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막막함.

그 마음의 정체를, 오늘 함께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버거운 당신에게

오늘 아침도 알람 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을지 모릅니다.

단 몇 분이라도 더 눈을 감고 싶은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러면 안 된다는 날카로운 채찍질.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이 작은 전쟁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일어나야만 하니까 일어나는 것.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왜 이렇게까지 일어나기 힘든지 깊게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의 몸이 가장 먼저 아는 건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도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이불의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지고, 방 안의 공기가 유독 차갑게 다가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습니다. 해야 할 일들의 무게에 마음이 먼저 짓눌려 버린 탓입니다.

마치 경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무거운 갑옷을 입고 출발선에 서 있는 기분과 같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창밖 풍경 대신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오늘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신경 써야 할 문제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죠.

내 마음이 지금 어떤 색깔인지, 내 몸이 얼마나 피곤한지 돌아볼 틈은 없습니다.

그저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회사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켤 때, 우리는 익숙하게 표정을 바꿉니다. 괜찮은 척, 바쁜 척,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있는 척.

그 가면 뒤에 숨은 진짜 내 마음이 어떤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조차 들여다보기를 포기합니다.

점심시간은 잠깐의 휴식이 아니라, 오후의 업무를 버텨내기 위한 ‘연료 주입’ 시간이 됩니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보다, 무엇을 빨리 먹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와도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남은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집에 가서도 해야 할 또 다른 의무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끝났다는 해방감보다는, 또 다른 의무의 시작이라는 압박감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일’들로 가득 찬 하루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자신을 잃어갑니다.

내가 뭘 좋아했는지, 뭘 할 때 가슴이 뛰었는지, 언제 가장 나다웠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집니다.

마치 내 삶이라는 영화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정해진 대사만 읊는 단역 배우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당신이 나약해서가 아닙니다. 게을러서도, 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많은 것들을 책임감 있게 해내기 위해 애써왔다는 증거입니다.

그저 잠시, 내 마음의 에너지가 모두 방전되어 버렸다는 신호일 뿐입니다.

이제는 괜찮다고, 그만 애써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그 목소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우리 마음속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엄격한 감독관이 한 명 살고 있습니다.

“이건 해야만 해”, “저건 하면 안 돼” 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목소리 말입니다.

이 목소리는 언제부터 우리와 함께하게 된 걸까요? 아마 아주 어릴 적,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부터였을 겁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그 말을 따라야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해” 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그 말을 따라야 했습니다.

어른이 되자 세상은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야 해”, “남들만큼은 살아야 해”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불안하지 않기 위해 그 말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 목소리들은 처음에는 외부에서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마치 ‘나 자신의 목소리’인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그치고 채찍질합니다. 쉬고 싶을 때도 ‘더 노력해야 해’ 라고 말하고, 즐거운 일을 할 때도 ‘이럴 시간이 어디 있어’ 라며 죄책감을 심어줍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던져준 돌멩이들을 하나씩 주워 내 배낭에 가득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을 걸어가는 것이죠.

그 돌멩이들에는 ‘기대’, ‘책임감’, ‘비교’, ‘두려움’ 같은 이름표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짐이 너무 무거워 허리가 아프고 숨이 차오르는데도, 이것이 당연한 삶의 무게라고 생각하며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짐이 가벼워지면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의 뿌리에는 종종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비난에 대한 두려움, 혼자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안전한 길, 남들이 다 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길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성실하다, 책임감 있다는 칭찬은 우리에게 달콤한 보상이었습니다. 그 칭찬을 계속 듣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나’를 지우고 ‘해야 할 일’을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칭찬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텅 빈 칭찬은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해야만 해’ 라는 목소리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연료였지만, 동시에 우리의 영혼을 조금씩 태워버리는 불꽃이기도 했습니다.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저 사람은 누구일까. 저 사람은 지금 행복할까.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면, 이제는 그 목소리의 정체를 똑바로 마주할 때입니다.

그것은 나의 본래 목소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나를 지배해 온 ‘가짜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변화의 첫걸음입니다.

먼지 쌓인 상자 속, 아주 작은 목소리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그 엄격한 감독관의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깊고 조용한 곳에, 또 다른 목소리가 숨 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고 싶어’ 라고 속삭이는, 아주 작고 수줍은 목소리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무시당해서 힘이 약해지고, ‘해야만 해’ 라는 큰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마치 다락방 구석, 먼지 쌓인 낡은 상자 속에 담긴 보물처럼 말이죠. 우리는 그 상자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어린 시절,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좋아서 그림을 그리던 마음.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뛰어놀던 마음. 칭찬이나 보상이 없어도, 그저 그 순간이 즐거워서 몰입했던 기억들.

그 순수한 즐거움의 기억 속에 ‘하고 싶어’ 라는 마음의 씨앗이 숨어 있습니다.

가끔 아주 불현듯, 그 목소리가 우리를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의 표지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릴 때. 길을 걷다 흘러나오는 노래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출 때.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잠시 모든 것을 잊고 넋을 잃을 때.

그 아주 짧은 순간, ‘해야만 해’ 라는 감독관이 잠시 한눈을 판 틈을 타 ‘하고 싶어’ 라는 진짜 내 마음이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입니다.

“아, 좋다.”, “예쁘다.”, “나도 저런 거 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갈 때, 그것이 바로 먼지 쌓인 상자 속에서 보내는 희미한 신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 신호를 금방 무시해 버립니다. ‘바쁜데 무슨’, ‘내가 저걸 어떻게 해’ 라며 스스로의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은 비현실적이고, 철없는 생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사탕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어른스럽지 못한 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작은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서둘러 다른 생각으로 덮어버리곤 했습니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떠올리며, 그 감상적인 마음을 쫓아내는 것이죠.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야말로 진짜 ‘나’의 목소리입니다. 세상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오직 내 영혼이 원하는 것을 가리키는 나침반입니다.

그 나침반이 지금은 녹슬고 먼지에 덮여 있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준다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목소리를 찾는 여정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꿈을 찾거나,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모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일상 속에서 아주 작게 반짝이는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아주 희미하게라도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면, 그것이 바로 시작의 신호입니다.

그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

‘하고 싶어’ 라는 목소리를 듣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잃어버렸던 감각을 다시 깨우는 것에 가깝습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근육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고 힘들 수 있습니다.

거창한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계획과 목표를 잠시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루에 단 5분, 아무것도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해 보세요.

알람을 맞추지 않고, 스마트폰도 멀리 둔 채로,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안할 겁니다. 이 시간에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안함을 그저 가만히 지켜봐 주세요. 마치 흘러가는 구름을 보듯,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속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들 때, 아주 작은 틈이 생깁니다. 그 틈으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올 수 있습니다.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싶다.’, ‘햇볕을 쬐고 싶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다.’

이런 아주 사소하고 작은 바람들이 떠오를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고 싶어’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거창한 ‘꿈’이나 ‘목표’만을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진짜 ‘하고 싶어’는 그렇게 거창한 모습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아주 작은 감각적인 즐거움에 가깝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보세요.

“지금 당장, 돈이나 시간 걱정 없이 딱 한 가지를 할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세계 여행’이나 ‘퇴사’ 같은 큰 것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시원한 물 한잔 마시기’, ‘잠깐 눕기’, ‘좋아하는 과자 하나 먹기’. 이런 답이 나온다면, 그게 바로 지금 당신의 마음이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작은 바람을 즉시 행동으로 옮겨보세요.

시원한 물을 마시면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과자를 먹으면서 그 바삭함과 달콤함을 온전히 느껴보세요.

이 작은 행동을 통해, 우리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존중해 주었다’는 성공의 경험을 쌓게 됩니다.

이 경험이 쌓이면, 내 마음은 조금씩 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할 겁니다.

마치 낯을 가리던 아이가, 상대방이 자신을 해치지 않고 다정하게 대해준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처럼 말입니다.

몸의 감각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지금 어깨가 뭉쳐 있지는 않은지, 숨이 너무 얕지는 않은지.

어깨가 뭉쳐있다면 부드럽게 돌려주고, 숨이 얕다면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 보세요.

‘해야만 해’ 라는 생각은 우리를 머릿속에 가두지만, ‘하고 싶어’ 라는 마음은 몸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이 편안해질 때, 마음도 함께 이완되면서 진짜 목소리를 낼 힘을 얻게 됩니다.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게 당연해요

“그래서, 뭘 하고 싶으신데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덜컥 겁부터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시험문제를 받았는데 답을 전혀 모르는 학생처럼 당황스럽습니다.

남들은 다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은데, 나만 텅 비어있는 것 같아 초조해집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자책하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까?’, ‘나에게는 열정이 없는 걸까?’

하지만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정상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하라는 것’, ‘해야만 하는 것’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마치 평생 남이 정해준 식단대로만 밥을 먹어온 사람에게,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뭐예요?”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다양한 음식을 맛본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바로 고를 수 있겠어요?

우리는 그동안 ‘하고 싶다’는 마음의 근육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근육이 약해져 있고, 어떻게 힘을 줘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린 것이 당연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또 하나의 거대한 ‘해야 할 일’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열정적인 삶을 살아야 해’, ‘꿈을 가져야 해’ 라는 사회적인 압박이, 우리를 더욱 조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억지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일’로 만들어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취미를 따라 해보거나, 갑자기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기도 하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방 지치고 흥미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좌절합니다. ‘나는 역시 안 되나 봐.’

이제 그 조급함과 자책을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상태이구나.’

현재의 상태를 그저 담담하게 인정해 주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야말로, 앞으로 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뜻이니까요.

마치 낯선 도시에 처음 도착한 여행자처럼, 지금 우리는 ‘나’라는 사람의 마음에 처음 도착한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지도를 다 알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골목길을 헤매기도 하고,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씩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 길은 꽃이 예쁘게 피어 있구나, 저 가게는 빵 냄새가 정말 좋구나.

그렇게 작은 발견들이 모여, 나만의 지도를 완성해 나가는 겁니다.

지금은 백지상태의 지도를 들고 서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앞으로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는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거대한 의무에서 아주 작은 기쁨으로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때, 무언가 대단하고 멋진 결과를 내야 한다는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거나, 악기를 멋지게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여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하고 싶어’ 라는 마음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에 있습니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아무런 결과물이 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내가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이제 시선을 거대한 의무에서 아주 작은 기쁨으로 옮겨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운동을 해야 해’ 라는 의무감에 헬스장에 가는 대신, ‘산책하고 싶다’는 마음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동네 한 바퀴를 걸어보는 겁니다.

‘책을 읽어야 해’ 라는 압박감에 어려운 고전을 펼치는 대신,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림이 많은 만화책을 읽는 겁니다.

‘자기계발을 해야 해’ 라는 불안감에 온라인 강의를 결제하는 대신, ‘옛날 생각이 나서’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레고를 조립해 보는 겁니다.

이런 작은 행동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순수한 즐거움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쓸모’와 ‘효율’의 잣대로 모든 행동을 평가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행동이 내 경력에 도움이 되는가? 내 건강에 좋은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가?

하지만 ‘하고 싶어’의 세계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필요 없습니다. 유일한 질문은 이것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즐거워?”

아무런 쓸모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진흙 놀이를 하는 것처럼요. 아이는 진흙으로 무언가 대단한 작품을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손으로 진흙을 만지고, 주무르고, 던지는 그 감촉과 과정 자체를 즐길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의 진흙 놀이’가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이 어색하고 죄책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기쁨의 순간들이 모여, 방전되었던 우리 마음의 배터리를 조금씩 채워줄 겁니다.

아주 작은 촛불 하나가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듯, 이 작은 기쁨들이 ‘해야만 해’ 라는 의무감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일상에 따뜻한 빛을 비춰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당신을 미소 짓게 했던 아주 작은 순간은 무엇이었나요?

점심시간에 마신 달콤한 커피 한 잔? 창문으로 들어온 따스한 햇살? 우연히 들은 추억의 노래?

그 작은 기쁨들을 놓치지 말고,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두세요.

그것들이 모여 당신의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힘이 되어줄 테니까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기적일까 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예상치 못한 감정이 불쑥 찾아오기도 합니다. 바로 ‘죄책감’입니다.

내가 편안하게 쉬고 있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는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쓰는 것이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느껴집니다.

‘나만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라는 생각은, 모처럼 찾아온 즐거움을 금세 불편한 마음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챙기고, 나의 필요보다 집단의 의무를 우선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희생’과 ‘헌신’은 숭고한 가치로 여겨졌고,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난받기 쉬웠습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를 뒤로 미루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내 마음을 챙기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고,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철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마음을 따르는 것이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비행기에서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왜 항상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라고 할까요?

내가 먼저 숨을 쉴 수 있어야,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도울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가장 책임감 있는 행동입니다.

내가 먼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야, 그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마치 물이 비어 있는 컵은 다른 컵을 채워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의 컵이 먼저 채워져야, 그 넘치는 사랑과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해야만 하는 일’에 치여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을 때, 우리는 오히려 더 쉽게 지치고 예민해집니다.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은, 그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얻은 즐거움과 만족감은, 나를 더 다정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 ‘하고 싶다’는 마음을 따를 때 드는 죄책감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이건 이기적인 게 아니야.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모두를 위한 거야.”

나를 위한 작은 선물 하나를 사는 것,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고 나의 휴식을 선택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당신은 세상 그 누구보다 당신 자신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나에게 ‘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기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참 관대합니다.

친구가 힘들다고 하면 “좀 쉬어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고, 연인이 실수를 하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다독여 줍니다.

하지만 유독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인색합니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라며 자책하고, 조금이라도 쉬려고 하면 ‘게으르다’고 채찍질합니다.

마치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나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고 감시하고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을 발견했더라도, 이 엄격한 내면의 감시관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그래도 돼’ 라는 허락이 떨어져야, 비로소 우리는 마음 편히 그 행동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 자신에게 가장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아주 따뜻한 목소리로 허락의 말을 건네주세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누워만 있어도 괜찮아.”

“오늘은 정말 하기 싫은데, 저녁은 그냥 시켜 먹어도 괜찮아.”

“꼭 완벽하게 해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시도해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이 ‘괜찮아’ 라는 말은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옭아매던 ‘해야만 해’ 라는 단단한 사슬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주문입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어색하고 입에 잘 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이 낯간지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거울을 보고 연습해 보세요. 거울 속의 나는, 세상의 그 어떤 비난과 평가로부터 당신이 지켜줘야 할 단 한 사람입니다.

그 지친 눈을 바라보며 말해주세요.

“그동안 정말 애썼다. 이제 좀 쉬어도 괜찮아.”

허락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 속 아주 작은 순간들마다, 스스로에게 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 ‘건강에 좋은 걸 먹어야 해’ 라는 생각 대신 ‘오늘은 그냥 이게 먹고 싶으니까, 먹어도 괜찮아’ 라고 허락해 주세요.

퇴근 후에 너무 피곤하면, ‘운동 가야 하는데’ 라는 의무감 대신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까, 그냥 쉬어도 괜찮아’ 라고 허락해 주세요.

이 작은 허락들이 쌓이면, 우리는 점차 ‘해야만 하는 일’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해도 된다’는 허락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허락을 구하며 살아왔습니다. 부모님의 허락, 선생님의 허락, 상사의 허락, 세상의 허락.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의 허락은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스스로가 당신 삶의 주인이 되어, 모든 순간에 대한 허락을 내려주세요.

당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합니다.

‘해야만 해’와 ‘하고 싶어’가 만나는 길목에서

‘하고 싶어’ 라는 마음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결국 달라지는 건 없잖아. 어차피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건 똑같잖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입니다. ‘해야만 해’와 ‘하고 싶어’를 서로 싸우는 적이 아니라, 함께 길을 가는 친구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근하는 것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 아주 작은 ‘하고 싶어’를 숨겨둘 수 있습니다.

‘출근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어.’, ‘점심시간에 새로 생긴 카페에 가보고 싶어.’, ‘퇴근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어.’

이 작은 ‘하고 싶어’ 들이 하루를 버티게 하는 즐거운 동력이 되어 줍니다.

하기 싫은 보고서를 써야만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을 빨리 끝내고,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고 싶어’ 라는 즐거운 목표를 설정하는 겁니다.

‘해야만 하는 일’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 힘든 깔딱고개를 넘어야 하는 것처럼, 지금의 힘든 순간이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입니다.

때로는 ‘해야만 하는 일’ 속에서 예상치 못한 ‘하고 싶어’를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었는데, 하다 보니 의외의 재미를 느끼고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왕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즐거움이라도 찾아보고 싶어’ 라는 마음으로 일을 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루한 자료 정리 업무를 할 때, ‘어떻게 하면 이걸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 라는 게임 퀘스트처럼 접근해 보는 겁니다.

나만의 규칙을 만들고, 작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스스로에게 소소한 보상을 해주는 방식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꽤 해볼 만한 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모든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바꿀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일에 끌려다니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일을 대하는 태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해야만 해’ 라는 생각에 짓눌려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고 싶어’ 라는 작은 틈을 만들었을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작은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잿빛이었던 우리의 일상을 조금 더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여 줄 것입니다.

‘하고 싶어’로 그리는 나의 새로운 지도

지금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려준 지도를 들고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지도에는 ‘성공으로 가는 길’,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정작 그 길을 걷는 우리는 즐겁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나의 ‘하고 싶어’ 라는 마음을 따라 그려나가는 지도.

그 지도는 처음에는 텅 비어 있을 겁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첫걸음은 아주 작아도 좋습니다.

오늘 아침, ‘커피를 마셔야 해’ 대신 ‘나는 향긋한 허브티를 마시고 싶어’ 라는 마음을 따라 차를 우려 마셨다면, 당신은 이미 지도에 첫 번째 점을 찍은 것입니다.

그 점 옆에 또 다른 점을 찍어 나가는 겁니다.

‘오늘은 버스 대신 걸어서 퇴근하고 싶어’, ‘주말에는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뒹굴고 싶어.’

이 작은 점들이 하나둘씩 모여 선이 되고, 그 선들이 이어져 당신만의 길이 됩니다.

그 길은 다른 사람의 길처럼 반듯하거나 빠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불구불하고,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고,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당신의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풍경과 감정들이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채워줄 것입니다.

‘하고 싶어’를 따라가는 삶은, 매일이 행복하기만 한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힘든 날도 있고, 눈물이 나는 날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단단한 감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잠시 멈춰서 내 마음의 나침반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풍경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해야만 해’ 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고 싶어’ 라는 설레는 나침반을 손에 쥔 당신.

당신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 9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계절에, 당신의 마음속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기를 바랍니다.

그 바람은 거대한 태풍이 아닐지라도 괜찮습니다. 책장을 스르륵 넘기는 기분 좋은 미풍처럼, 당신의 일상에 작은 변화와 설렘을 가져다줄 테니까요.

우리의 마음은 마치 작은 정원과 같습니다. 오랫동안 ‘해야만 해’ 라는 딱딱한 돌멩이와 잡초들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제 그 돌멩이를 하나씩 걷어내고 마음을 부드럽게 갈아줄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고 싶어’ 라는 아주 작은 씨앗을 심어보는 겁니다.

어떤 화려한 꽃이 필지, 어떤 달콤한 열매가 열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씨앗을 심고, 매일 작은 관심을 기울여 물을 주었다는 그 과정 자체입니다.

나의 마음 정원을 스스로 가꾸기 시작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당신의 세상은 이미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정원에서 당신만의 고유한 꽃이 피어나는 날을, 온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중요 안내

본 웹사이트의 정보는 일반적인 참고 자료이며, 전문적인 정신건강 상담, 진단, 치료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정신적 어려움이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있다면, 반드시 자격을 갖춘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면 즉시 도움을 요청하세요.

사랑을 나누세요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