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준을 자꾸 밖에서 찾게 되는 나에게

늦은 밤,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간. 방 안에는 스탠드의 희미한 주황빛과 휴대폰 화면의 차가운 푸른빛만이 유령처럼 떠 있습니다. 손가락은 이미 의식을 벗어나, 습관처럼 화면을 위아래로 움직입니다.

그 작은 사각형의 액정 속에는 온통 반짝이는 세상이 가득합니다. 멋진 곳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근사한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자랑하는 모습들, 사랑과 성공으로 완벽하게 포장된 이야기들.

그 눈부신 빛의 파편들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봅니다. 그러다 문득, 검게 꺼진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마주합니다.

왠지 모르게 초라하고, 한없이 부족하고, 세상의 속도에서 한참 뒤처진 것만 같은 기분이 거대한 파도처럼 순식간에 밀려옵니다.

분명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마음 한구석은 늘 찬바람이 부는 것처럼 허전할까요. 큰맘 먹고 새 옷을 사고, 남들이 좋다는 유명 맛집에 찾아가 줄을 서고, 누군가 부러워할 만한 사진을 찍어 공들여 올리는 순간에는 잠시 즐겁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마치 달콤한 솜사탕 같아서, 입에 넣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 찰나의 달콤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전보다 더 깊고 어두운 공허함과 ‘다음엔 또 뭘 해야 잠시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한 질문만이 무겁게 남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채 망망대해를 떠도는 여행자 같은지도 모릅니다. 행복이라는 신비로운 보물섬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는 분명한데, 손에 쥔 나침반의 바늘은 자꾸만 내 마음속이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세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가진 바로 저것, 저 사람이 누리는 특별한 경험, 저 사람이 받는 뜨거운 인정. 저것들만 내 손에 넣으면, 나도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불안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너무나도 간절히 믿으면서 말이죠.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바깥세상을 향해 내디딜수록, 정작 내 마음의 땅은 점점 더 메마르고 황폐해져 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런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행복의 기준점을 자꾸만 밖에서 찾아 헤매다 완전히 지쳐버린 당신의 마음에 건네는, 아주 작고 다정한 속삭임입니다. 이제는 그만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이라는 따뜻한 초대장이기도 합니다.

저 반짝이는 걸 가지면, 나도 빛날 수 있을까

우리의 눈은 구조적으로 늘 바깥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다른 사람의 삶은 내 삶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자세하게 보이나 봅니다. 친구가 새로 산 명품 가방, 동료가 떠난 지중해의 휴양지, SNS에서 본 누군가의 완벽한 몸매. 그것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화려한 포장지에 싸인 선물 상자처럼 보입니다. 포장지 안에는 분명 엄청난 행복이 들어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 눈부신 선물 상자를 보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서는 아주 작고 교활한 목소리가 속삭이기 시작합니다. ‘저걸 가지면 너도 저렇게 행복해 보일 수 있어.’ ‘저곳에 가면 너의 지루한 일상도 특별해질 거야.’ ‘저런 몸매를 가지면 모두가 너를 부러워하게 될 걸?’ 그 목소리는 너무나 달콤하고 유혹적이어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속삭임에 넘어가고 맙니다.

마치 내 삶의 비어 있는 조각을 채워줄 유일한 퍼즐인 것처럼, 그 반짝이는 것들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갖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어느새 ‘이것을 갖지 못하면 내 인생은 실패한 거야’라는 절박함으로 변해버립니다. 그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많은 것을 참아냅니다. 하기 싫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정말로 사고 싶었던 다른 소소한 것들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편한 인간관계를 억지로 유지하기도 합니다. 그 빛나는 목표가 있기에 오늘의 힘듦과 고통을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다독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은 때로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그것을 향해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하는 내 모습이 꽤 괜찮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목표가 있다는 건, 어쨌든 내가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처럼 느껴지니까요.

우리는 상상합니다. 그토록 애타게 원하던 것을 마침내 손에 넣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요. 모든 사람이 나를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내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으쓱해지는 그 짜릿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그려봅니다.

그 황홀한 상상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초라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부족하지도, 외롭지도 않습니다. 반짝이는 그것과 함께, 나 자신도 덩달아 빛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마법의 아이템을 얻은 동화 속 주인공처럼요.

그래서 우리는 더욱 필사적으로 그것을 좇습니다. 내 삶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유일한 마스터키라고 굳게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뜨거운 사막의 신기루를 보고 진짜 오아시스라고 믿으며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달려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반짝임이 나의 모든 갈증과 허기를 남김없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기대합니다.

그것이 특정 브랜드의 물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의 인정이나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책이나 눈에 보이는 성취일 수도 있겠지요. 형태는 제각각 다르지만, 그것들이 내 행복을 완벽하게 보장해 줄 거라는 믿음의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같습니다.

‘이 시험만 합격하면.’, ‘저 사람과 결혼만 하면.’, ‘이 집만 손에 넣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에 조건을 답니다. 마치 그 까다로운 조건들이 모두 충족되기 전까지는, 지금의 나는 행복할 자격조차 없다는 듯이 스스로에게 엄격한 선을 긋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나는 늘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럽습니다. 미래의 언젠가, 그 모든 목표를 달성한 ‘완벽해진 나’만이 비로소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지금의 나는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있는 존재일 뿐, 행복 그 자체를 온전히 누릴 자격은 아직 없다고 스스로를 유예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을 자꾸만 내 안이 아닌 밖에서, 그리고 지금이 아닌 아득한 미래에서 찾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지금 여기의 나는 늘 부족하고 결핍된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의 삶은 이미 완성된 화려한 유화 같은데, 내 삶은 아직 밑그림만 대충 그려진 텅 빈 스케치북 같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다른 사람의 그림에서 멋져 보이는 색깔을 빌려와 내 그림을 허둥지둥 채우고 싶어 합니다.

저 사람의 강렬한 파란색, 이 사람의 따뜻한 빨간색을 닥치는 대로 가져와 덧칠하면, 내 볼품없는 그림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멋지게 완성될 거라고 믿으면서요.

하지만 우리는 곧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남의 물감으로는 결코 내 그림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토록 원하던 반짝이는 것들을 모두 손에 넣는다고 해서, 내가 온전히 빛날 수는 없다는 냉혹한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좇는 것은 어쩌면 그 물건이나 경험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가졌을 때 비로소 따라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 사회적인 인정,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마침내 확인받고 싶은 나의 존재 가치.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들을 갈망하는 것이겠지요.

손에 쥐고 나면 왜 마음은 텅 비는 걸까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고, 피땀 흘려 노력한 끝에, 드디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 날이 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은 정말이지 짜릿합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이제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입니다.

가장 먼저 SNS에 인증 사진을 정성껏 찍어 올리고, 친구들에게 은근슬쩍 자랑도 합니다. 쏟아지는 ‘좋아요’와 부러움이 섞인 댓글들을 보며 잠시 우쭐한 마음도 듭니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구나, 이 맛에 사는 거지, 싶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온 세상을 뒤흔들 것만 같았던 그 강렬했던 감정은 아주 짧게 머물다 떠나갑니다. 마치 한여름 밤의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가 순식간에 한 줌의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립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내 세상의 전부였던 그것이, 오늘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어쩐지 시들하고 평범해 보입니다. 방 한구석에 놓인 새 가방, 지갑 속에 고이 넣은 비행기 표, 명함에 새로 업데이트된 직함. 그것들은 더 이상 어제처럼 내 마음을 미친 듯이 뛰게 하지 않습니다.

벅찬 기쁨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차갑고 낯선 허무함과 당혹감이 밀려옵니다. ‘어? 이게 아닌데. 분명 이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행복해야 하는데.’ 마음속에서 혼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만족감과 깊은 행복이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의 유효기간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짧습니다.

이 느낌은 마치 며칠을 굶어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눈앞의 음식을 먹어 치웠는데, 먹고 나니 극심한 포만감과 함께 더부룩하고 속이 불편한 느낌과 비슷합니다. 분명 텅 빈 배를 채웠는데, 만족스럽지가 않은 겁니다.

그리고 곧, 우리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또 다른 반짝이는 것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합니다. ‘아, 내가 목표를 잘못 설정했나 봐. 진짜 행복은 저건가 봐.’

하나의 산을 힘들게 넘었더니, 저 앞에 훨씬 더 높고 더 멋져 보이는 산이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땀을 닦을 틈도 없이 다음 산을 향해 또다시 힘겨운 등반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됩니다.

이 끝없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완전히 지치고 맙니다. 무언가를 성취해도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늘 새로운 목표에 강박적으로 쫓기는 삶. 이것이 내가 그토록 원했던 행복이 맞는가, 깊은 의심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행복의 실체를 처음부터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소유(possession)’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갖고 싶던 물건, 원하던 직책, 꿈에 그리던 여행. 이것들을 내 손안에 넣으면, 행복도 마치 물건처럼 덩달아 내 것이 될 거라고 굳게 믿는 것이죠.

하지만 행복은 물건처럼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둘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느끼는(feeling)’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잠시, 뺨을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느끼는 찰나의 감정에 가깝습니다.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 빨리 사라져 버리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외부의 것을 통해 얻는 이런 종류의 기쁨을 ‘쾌락(pleasure)’이라고 부릅니다. 쾌락은 아주 강렬하고 짜릿하지만, 금방 익숙해지고(적응)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는 치명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10만큼의 기쁨을 주던 것이, 두 번째에는 5만큼, 세 번째에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과 같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 20, 30, 100의 더 큰 쾌락을 찾아 끝없이 헤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입니다. 쳇바퀴 위에서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우리는 결국 제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오히려 달리면 달릴수록 더 큰 갈증과 깊은 허무함만 남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좇았던 것은 진짜 행복이 아니라, 행복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가짜, 즉 ‘쾌락’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이것이 내가 찾던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고,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것입니다.

신기루를 좇아 사막을 건넜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모래뿐이었을 때의 허탈함과 정확히 같습니다.

우리는 행복이 저 멀리 밖에 있다고 굳게 믿었지만, 사실 행복은 내 안의 토양에서 스스로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밖에서 좋은 물과 비료를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애초에 내 안에 행복의 씨앗 자체가 없다면 꽃은 결코 피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 나만 조연인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씩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점심시간의 짧은 휴식 시간에,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수많은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화면 속의 세상은 365일, 24시간 내내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누군가는 눈부신 해변의 리조트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있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영화처럼 멋진 프러포즈를 받고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수많은 사람의 축하와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마치 잘 만들어진 영화의 예고편 같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극적이고, 가장 화려하고, 가장 행복한 하이라이트 장면들만 정교하게 편집해서 모아놓은 것이죠.

그런 완벽한 예고편들을 계속해서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삶의 ‘전체 영상’과 그것을 비교하게 됩니다. 내 삶은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인데, 왜 다른 사람들의 삶은 매 순간 저렇게 특별하고 빛나는 걸까요. 이런 생각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모두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 같은데, 나만 무대 구석의 어두운 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는 이름 없는 조연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도 나에게 주목하지 않는 것 같고, 내 삶에는 아무런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가 무의미하게 반복될 뿐입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비교는 우리를 조급하게 만듭니다. 나만 뒤처지고 있는 것 같다는 극심한 불안감, 나만 이 행복의 축제에서 소외되었다는 외로움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주인공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하려고 애씁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장소에 가고, 그럴듯한 사진을 찍어 올리며, ‘나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복을 필사적으로 ‘연기’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입으로 맛을 음미하기보다, 가장 예쁘게 나오는 각도를 찾아 수십 장의 사진부터 찍습니다. 눈앞에 멋진 풍경이 펼쳐지면 가슴으로 감동을 느끼기보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먼저 보게 됩니다. 내 눈이 아닌, 카메라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죠.

나의 모든 소중한 경험은 ‘인증’과 ‘전시’를 위한 소품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경험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 되어버립니다.

‘좋아요’ 숫자가 내 행복의 객관적인 척도가 되고, 다른 사람의 반응 하나하나가 내 하루의 기분을 천국과 지옥으로 오가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런 보여주기식 행복은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라는 불안정한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아주 작은 비판이나 무관심이라는 파도에도 쉽게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SNS를 통해 보는 다른 사람의 삶은 그들의 ‘전부’가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수백 장의 사진 중 가장 잘 나온 단 한 장의 사진일 뿐입니다.

그 완벽한 사진의 뒤편에는, 우리와 똑같이 지루한 일상, 남모를 고민, 힘겨운 순간, 아무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이 분명히 숨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의 화려한 ‘예고편’과 나의 지루한 ‘다큐멘터리 전체’를 비교하는 어리석고 불공정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게임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삶이 정말로 부족하거나 가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왜곡된 기준을 나의 삶에 들이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조연인 인생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무대에서, 각자의 이야기의 유일무이한 주인공입니다.

내 이야기의 가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비교해서 결정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관객이 많고 적음으로 그 가치가 매겨지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화려한 사건이나 극적인 반전은 없더라도, 매일 반복되는 평범하고 소박한 하루하루가 벽돌처럼 쌓여 나의 소중한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이제 그만 다른 사람의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조금은 어설프고 소박하더라도 온전히 나의 무대에 집중해야 합니다.

관객이 단 한 명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내 삶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관객은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의 시선이라는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행복의 기준을 자꾸만 밖에서 찾다 보면, 아주 중요하고 치명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의 진짜 소리를 듣는 능력입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더 좋아 보이는 것’, ‘사회적으로 더 인정받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 말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메뉴를 고를 때조차, 내가 정말 먹고 싶은 소박한 김치찌개보다 왠지 더 ‘있어 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메뉴를 고릅니다. 주말에 무엇을 할지 정할 때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보다 SNS에 올리기 좋은 핫한 전시회나 카페를 우선순위에 둡니다.

나의 모든 선택의 기준이 점점 ‘나’라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타인의 시선’이라는 외부의 좌표로 옮겨져 갑니다.

‘이걸 선택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게 요즘 유행이니까, 나도 뒤처지지 않으려면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온통 가득 채웁니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나는 그냥 조용한 공원에서 책 읽고 싶은데…’ 하는 작고 연약한 소리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라며 애써 무시하고 억눌러 버립니다.

그렇게 외부의 시끄러운 소리에만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 마음의 소리는 점점 더 작아지고 희미해집니다. 나중에는 아예 들리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결국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할 때 진정으로 즐거운지, 심지어 지금 내 기분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마음에게 길을 물어봐야 하는데, 마음으로 가는 길이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버린 것과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저 남들이 많이 가는 길로 불안하게 따라갈 뿐입니다.

진정한 ‘나’는 점점 사라지고, 세상이 만들어 놓은 ‘괜찮은 사람’의 기준에 맞춰진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없고, 타인의 욕망의 집합체만 남게 됩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가져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고 늘 공허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들은 애초에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종류의 음식이 아니었던 거죠.

마치 나는 따뜻한 밥과 국이 간절히 먹고 싶은데, 주변에서 모두가 양식이 최고라고 하니 억지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위장은 채워질지 몰라도, 마음의 허기는 전혀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행복을 성공과 무조건적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넓은 집. 이런 것들을 성공의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얻으면 당연히 행복도 따라올 것이라고 맹신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정해놓은 획일적인 성공이 반드시 나의 개인적인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높은 연봉을 받는 대기업 임원이 되는 것보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소박하게 사는 것에서 훨씬 더 큰 행복과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북적이는 도시의 화려한 펜트하우스보다, 한적한 시골에서 작은 텃밭을 가꿀 때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행복의 모양은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세상에 단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 마음만이 나에게 맞는 행복이 어떤 모양인지, 어떤 색깔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유일하고 소중한 길잡이의 목소리를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행복의 지도를 찾고 있었던 겁니다.

이제 다시 내 마음의 소리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는 연습을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들려서 잘 알아들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외부의 소음이 너무 커서 마음의 소리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하루 중 아주 잠깐이라도 좋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차분히 내 마음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보세요.

‘지금 진짜 기분이 어때?’ ‘오늘 점심으로 뭐가 제일 먹고 싶어?’ ‘만약 지금 당장 딱 한 가지만 할 수 있다면, 뭘 가장 하고 싶어?’

이렇게 아주 사소하고 작은 질문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이 더듬거리며 대답할 때까지, 조용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는 겁니다.

그렇게 내 마음과 다시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고, 조금씩 친해지는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위한 진짜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잠시 멈춰서, 나에게 말을 걸어보는 시간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앞만 보고, 밖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정작 내 안을 깊이 들여다볼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는 잠시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더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지금의 나에게 이미 무엇이 있는지 차분히 살펴보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매일 아주 잠깐이라도 좋습니다. 단 5분이든 10분이든,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신성한 시간을 가져보세요.

이 시간만큼은 잠시 휴대폰을 다른 방에 두거나 전원을 꺼두고,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나를 의식적으로 분리시키는 겁니다.

조용한 방에 편안하게 앉아 부드럽게 눈을 감고, 나의 호흡에 모든 의식을 집중해 보세요. 코끝으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그 감각을, 아무런 판단 없이 그저 가만히 느껴보는 겁니다.

들숨에 세상의 맑고 좋은 기운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고, 날숨에 내 안에 쌓여 있던 무거운 감정들과 스트레스가 검은 연기처럼 빠져나간다고 부드럽게 상상해 보세요.

이 단순한 호흡 알아차림 행위만으로도,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차분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조금 고요해졌다면, 천천히 나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는 겁니다. 비난하거나 평가하려는 판사의 마음이 아니라, 그저 오랜 친구의 안부를 묻듯이 다정하게 말이죠.

‘오늘 하루, 정말 어땠어?’ ‘어떤 순간이 제일 힘들었고, 반대로 어떤 순간이 조금이나마 괜찮았어?’

마음속에서 어떤 대답이 올라오든, 그것을 판단하거나 분석하려 들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들어주세요. ‘아, 그랬구나. 정말 힘들었겠네.’ ‘그런 좋은 순간도 있었구나, 참 다행이다.’ 하고 따뜻하게 공감해주세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은 세심하게 살피고 진심으로 위로해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감정은 너무나 쉽게 무시하고 하찮게 여겨 버리곤 합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힘들다’, ‘외롭다’, ‘불안하다’ 같은 소중한 감정들을 ‘쓸데없는 생각’, ‘나약한 소리’라고 치부하며 억누르기에만 바빴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내 마음이 나에게 보내는 매우 중요한 신호입니다. 지금 내가 무언가 불편하고, 당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구조 신호 말입니다.

그 간절한 신호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하면, 자동차의 경고등을 무시하고 운전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큰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내 감정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세요. 어떤 감정이 찾아오든, ‘어서 와, 너의 이야기가 정말 듣고 싶었어.’ 하고 두 팔 벌려 환영해주세요.

감정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날씨처럼 그저 왔다가 스쳐 지나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입니다. 하늘에 비가 온다고 해서 하늘을 탓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잖아요.

내 마음에도 슬픔의 비가 내릴 수 있고, 불안의 안개가 자욱하게 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땐 억지로 맑아지라고 다그치기보다, 그저 조용히 우산을 펴 들고 비가 그치기를, 안개가 걷히기를 함께 기다려주면 됩니다.

이러한 꾸준한 자기 대화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더 깊이, 그리고 명확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나는 언제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나에게 진정한 휴식은 무엇인지. 나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알아가듯이, 나 자신과 서서히, 그리고 깊이 가까워지는 겁니다.

이렇게 나와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단단해지면, 더 이상 밖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거나 안달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이 없어도, 나는 이미 충분히 괜찮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건강한 자존감의 핵심입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기둥이 세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외부에서 비교와 비난의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와도, 쉽게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는 강한 내면의 힘이 생깁니다.

이 멈춤의 시간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앞으로 더 행복하고 단단하게 나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준비운동입니다.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라고 해요

우리는 지금까지 행복을 저 높은 산 정상에 꽂혀 있는 깃발처럼,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어려운 목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정상에 올라서야만 비로소 차지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라고요.

하지만 행복은 그렇게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이미 보석처럼 흩어져 있는 작은 조각들을 ‘발견’하는 것에 더 가까울지 모릅니다.

마치 어린 시절 하던 숨은그림찾기처럼, 평범하고 지루하게만 보였던 일상 속에 꼭꼭 숨어 있는 행복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능력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커튼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출근길에 무심코 지나치던 담벼락 틈새에, 어느새 꿋꿋하게 피어난 작은 들꽃 한 송이.

점심시간에 동료와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는 순간.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잔의 청량감. 푹신한 이불 속에 들어가 하루의 모든 피로를 스르르 녹여내는 그 평온한 순간.

이런 것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당연해서,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지냅니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기에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죠.

우리의 눈은 늘 저 멀리 있는 크고 화려한 행복, 즉 ‘이벤트성 행복’만 좇느라, 바로 내 발밑에 조용히 반짝이고 있는 작고 소박한 행복들은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하루를 실제로 빈틈없이 채우고, 우리를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진짜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작고 반복되는 일상의 행복들입니다.

거창한 행복은 아주 가끔 우리를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과 같지만, 이런 작은 행복들은 매일 우리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가족과 같습니다.

이제부터 의식적으로 내 주변의 작은 행복들을 찾아보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이 능력은 근육처럼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키울 수 있습니다.

‘행복 일기’나 ‘감사 일기’를 써보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 하루 나를 아주 잠깐이라도 미소 짓게 했던 지극히 작은 일 세 가지만 매일 밤 적어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오늘 아침에 마신 커피가 유난히 향긋하고 맛있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자리가 나서 편하게 앉아 왔다.’ ‘오랜만에 옛 친구에게서 반가운 안부 연락이 왔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퇴근하는 길이 즐거웠다.’

처음에는 하루에 세 가지를 채우는 것이 어색하고 무척이나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엔 감사할 일이 이렇게나 없나’ 하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행복을 발견하는 마음의 근육이 서서히 단련됩니다.

예전에는 무심코, 혹은 불평하며 지나쳤던 것들 속에서 감사와 기쁨을 찾아내는 새로운 시선이 생기는 것이죠. 세상을 보는 렌즈가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연습은 우리의 뇌를 ‘부정적인 것을 더 잘 찾아내는 생존 모드’에서 ‘긍정적인 것을 더 잘 찾아내는 행복 모드’로 바꾸는 과학적인 훈련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뇌는 원래 생존을 위해 위협이나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걱정, 불안, 불만 같은 것들을 더 쉽게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감사 일기를 통해 의식적으로 좋은 점들을 찾아내는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뇌의 신경 회로가 실제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금씩 재편성됩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닌데,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즉 나의 세계가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똑같은 하루를 살아도, 온갖 불평과 불만만 찾아내는 사람과 그 속에서도 작고 소중한 행복을 발견해내는 사람의 삶의 질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결국 ‘관점’의 문제입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삶은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외부의 조건이 아무리 좋아져도, 내 마음이 불만과 결핍으로 가득 차 있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부자들이 증명하는 진리입니다.

반대로, 남들이 보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는 삶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자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매일매일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큰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삶도 가치 있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고통으로만 여긴다면, 그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은 아주 찰나일 뿐이며, 그 후에는 더 큰 공허함이 찾아올 것입니다.

어쩌면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숨 가쁘게 내딛는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작은 풀꽃과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일지도 모릅니다.

‘괜찮은 나’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일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박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괜찮음’의 기준은 도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정한 걸까요?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해서, 남들만큼의 자산을 이루는 삶. 사회와 미디어가 끊임없이 정답처럼 제시하는 이 표준화된 기준들에 나를 억지로 맞춰가느라 우리는 늘 숨이 가쁩니다.

그 획일적인 기준에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나는 뭔가 잘못된 사람, 부족하고 낙오된 사람인 것 같은 깊은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똑같은 하나의 자로 재는 것이 과연 온당하고 합리적인 일일까요?

숲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키가 큰 나무도 있고, 땅에 가깝게 자라는 작은 나무도 있습니다. 화려하고 큰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고, 꽃 없이 묵묵히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도 있습니다. 각자의 모습 그대로 모두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작은 나무에게 왜 키가 크지 않냐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유한 존재입니다. 저마다 다른 재능과 성격, 다른 삶의 속도와 리듬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모습, 똑같은 속도로 달려야만 한다고 굳게 믿는 걸까요?

이제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낡고 비좁은 기준의 자를 과감하게 버리고, 나만의 새로운 자를 만들 시간입니다. ‘괜찮은 나’의 기준을 내 안에서부터 다시 세우는 일,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돈이나 명예, 사회적 지위보다 당신의 마음을 더 깊이, 더 뜨겁게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때, 스스로가 가장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가요?

이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은 오직 나 자신만이 알고 있습니다. 다른 그 누구도, 심지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 대신 답해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고 사회에 기여하는 삶에서 가장 큰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지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에서 살아있음의 기쁨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저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평온하고 안정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삶의 가장 큰 가치인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 중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외부의 압력이나 타인의 기대가 아닌, 온전히 ‘나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만의 단단한 기준이 바로 서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화려한 삶과 나의 소박한 삶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누가 더 빠르거나, 누가 더 나은 길을 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길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물론,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때로는 주변의 오해를 받거나, ‘너만 왜 그렇게 유별나게 구냐’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외부의 목소리 때문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인생이라는 배의 방향키를 다른 사람의 손에 불안하게 맡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조금 더 따뜻해져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넘어지고 끔찍한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야심 차게 세운 계획이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가혹하게 자책하기보다, ‘그럴 수 있지. 괜찮아. 이 경험을 통해 또 하나 배웠네. 다시 일어나면 돼.’ 하고 다독여주는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실패’처럼 보이는 경험일지라도, 그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조금이라도 성장했다면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값비싼 수업료를 낸 것뿐입니다.

나의 모든 성공적인 경험, 나의 모든 실패한 경험, 나의 모든 모습, 심지어 나의 약점과 부족함까지도 모두 남김없이 끌어안고 ‘이게 바로 나야. 이런 나를 사랑해.’ 하고 온전히 인정해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괜찮은 나’는 저 멀리 미래에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수많은 결점과 가능성을 함께 지닌 채 숨 쉬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의 나 자신입니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건네는 작은 선물들

우리는 종종 행복이 아주 특별한 날에만 찾아오는 희귀한 손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일, 크리스마스, 기념일, 꿈에 그리던 휴가, 혹은 무언가 큰 성취를 이룬 날. 그런 손에 꼽는 날들만이 행복할 가치가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99%를 차지하는 평범한 대부분의 날들을, 그 1%의 ‘특별한 날’을 위해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무채색의 시간으로 여깁니다.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며 ‘아, 주말은 또 언제 오나’ 하고 깊은 한숨을 쉬고, 몇 달 뒤에 있을 휴가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지루하고 고된 일상을 간신히 버텨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몇 번의 화려한 특별한 날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아주 보통의 날’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보통의 날들을 의미 없게, 그저 흘려보낸다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행복은 미래의 어느 날에 한꺼번에 찾아오는 거대한 보너스가 아니라, 매일의 고된 일상 속에 작은 보석처럼 숨어 있는 선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 선물을 발견하고 기꺼이 열어볼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아주 보통의 하루도 충분히 반짝이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잠결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생각해 보세요. 그 향기와 온기가 밤새 잠들어 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깨워주는 그 순간.

매일 걷는 익숙한 길 위에서 문득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순간. 어제는 보이지 않던 나뭇잎이 오늘은 조금 더 짙은 초록색으로 변한 것을 발견하는 작은 기쁨.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잠시 모든 시름과 걱정을 잊는 순간. 아름다운 멜로디와 진솔한 가사가 마치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은 깊은 위로.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 오늘 하루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순간. 나의 지치고 엉뚱한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그 따뜻한 눈빛에서 느끼는 깊은 안도감.

이 모든 것이 아주 보통의 하루가 우리에게 매일같이 건네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선물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엄청난 가치를 완전히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서 그 평범한 순간들을 온전히 느껴보세요. 당신의 오감을 활짝 열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에 모든 의식을 집중해 보세요.

커피를 마실 때는 그 향과 맛, 손에 전해지는 컵의 온기에 온전히 집중해 보세요. 내일 할 일이나 어제 했던 실수 같은 다른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요.

음악을 들을 때는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을 깊이 음미하고, 각각의 악기 소리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귀를 기울여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오직 그 사람의 눈과 표정과 목소리에만 온전히 집중해 보세요.

이렇게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연습을 할 때, 우리는 일상 속에 숨겨져 있던 놀라운 풍요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후회에서 벗어나,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함, 그것 자체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 행복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하루가, 사실은 수많은 작은 기적과 반짝이는 선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오늘 하루, 당신에게는 어떤 작고 소중한 선물이 도착했나요?

혹시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그 선물들을, 오늘 밤 잠들기 전에 한번 조용히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작지만 확실한 선물에 대해 조용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세요.

그런 따뜻한 마음들이 하루하루 쌓여갈 때, 우리의 보통의 하루는 더 이상 지루하고 무의미하지 않고, 반짝이는 순간들로 충만하게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속, 나만의 작은 정원을 가꾸듯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의 작은 정원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의 정원은 크고 화려한 꽃들로 가득하고, 어떤 사람의 정원은 소박한 들꽃과 푸른 나무들로 아늑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정원의 모습은 모두 다릅니다.

행복의 기준을 밖에서 찾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화려한 정원을 끊임없이 부러워하며 정작 자신의 정원은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집 정원에는 탐스러운 장미가 있는데, 왜 내 정원에는 없을까?’ 하고 한탄하며, 다른 사람의 정원에서 몰래 꽃을 꺾어 와 내 정원에 억지로 심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뿌리 없이 꺾어 온 꽃은 하룻밤도 버티지 못하고 금세 시들어 버리고, 그로 인해 내 정원은 더욱 황량하고 초라해질 뿐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정원을 그럴듯하게 흉내 내기 위해 내가 원하지도 않는 식물을 억지로 심기도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나무라고 해서 비싼 돈을 주고 심어보지만, 내 정원의 척박한 흙과 부족한 햇살과는 맞지 않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이내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남의 정원만 넋을 놓고 쳐다보느라, 정작 내 정원은 온갖 잡초가 무성해지고 땅은 비가 와도 물이 스며들지 않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갑니다.

심지어 내 정원에 이미 피어 있는, 작지만 개성 있고 예쁜 들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을 쓸모없는 잡초라고 생각하고 미워하며 뽑아버리기까지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다른 사람의 정원을 기웃거리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만의 정원을 정성껏 가꾸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정원의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비난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 잡초가 무성하고 땅이 척박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아, 이게 지금 내 정원의 모습이구나.’ 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긍정적인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 정원에 이미 무엇이 있는지 찬찬히, 애정을 갖고 살펴보는 겁니다. 내가 미처 몰랐던, 돌 틈 사이에 피어난 작은 희망의 싹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동안 무시했던,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튼튼한 나무 한 그루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마음의 잡초를 뽑아내야 합니다. ‘나는 부족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남들보다 뒤처졌어’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해로운 습관들. 이런 독초 같은 잡초들을 하나씩, 꾸준히, 매일 제거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의 땅을 부드럽게 갈아엎어 주어야 합니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좋은 책을 읽고, 나에게 긍정적인 영감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마음의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값진 일입니다.

이제 내가 정말로 심고 싶은 씨앗을 신중하게 고를 차례입니다.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보고 싶고 그 향기를 맡고 싶은 나만의 꽃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 성장, 평화, 나눔, 자유, 안정과 같은 나만의 소중한 가치들이 될 수 있습니다.

씨앗을 심었다면, 그것이 싹을 틔우고 자랄 수 있도록 꾸준히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어야 합니다. 매일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아주 작은 성공을 진심으로 격려해주고, 힘들 때는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것이 마음의 정원에 따뜻한 물과 햇볕을 주는 일입니다.

물론, 정원을 가꾸는 일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애써 가꾼 꽃이 속절없이 쓰러질 수도 있고, 예기치 않은 병충해가 생겨 애를 태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정성을 쏟다 보면, 어느새 내 정원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색깔과 향기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다른 누구의 정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되는 것이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온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행복은 밖에서 힘들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정성껏 피워내는 것이라는 위대한 진실을요.

이제, 당신의 마음속 정원을 다정하게 돌볼 시간입니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함께 걷는 길 위에

우리는 오랫동안 행복을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신기루 같은 목적지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지금 겪는 모든 고통과 불안은 끝나고, 영원한 평화와 기쁨만이 가득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달콤한 목적지를 위해 참고 견뎌야만 하는 고되고 지루한 시간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행복은 우리가 언젠가 도착해야 할 그곳이 아니라, 지금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는 이 길 위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길가에 수줍게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을 발견하는 기쁨, 함께 걷는 이와 따뜻한 눈빛과 미소를 나누는 순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든든한 나무 그늘의 고마움.

이 모든 것이 목적지가 아닌, 길 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행복입니다. 오직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면, 이 모든 소중하고 반짝이는 순간들을 전부 놓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행복을 밖에서 찾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먼저 걸어가서 안전하게 닦아 놓은 편하고 넓은 길만 따라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 길이 과연 나에게 맞는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풍경을 보여주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많은 사람이 가니까 안전하고 오를 것이라고 막연히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 있는 목적지가, 내가 정말로 원했던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립니다.

조금은 험하고 좁아서 남들이 잘 가지 않더라도, 나만의 오솔길을 용기 내어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때로 가시에 긁히고, 넘어지기도 하고,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고된 과정 속에서 나는 이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를 더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희미한 발자국을 불안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발자국을 이 땅 위에 하나하나 선명하게 새기며 나아가는 그 충만한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무언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행복은 ‘나는 이미 이대로 충분히 괜찮은 존재이며, 행복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에서부터 조용히 시작됩니다.

결핍감에서 출발하여 무언가를 채우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삶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충분한 행복의 씨앗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매일의 삶 속에서 발견하고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변화가 결코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평생에 걸쳐, 꾸준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끝없는 여정입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오늘 당장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세요.

그저 오늘, 어제보다 단 한 걸음이라도 나 자신에게 더 가까워졌다면, 내 마음의 소리에 한 번이라도 더 귀 기울여 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대단한 성공입니다.

밖으로만 향해 있던 시선을 안으로 돌리는 아주 작은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위대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속도에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마세요.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고유한 시간이, 당신만의 리듬이 있습니다.

어떤 꽃은 이른 봄에 피고, 어떤 꽃은 늦은 가을에 핍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핀다고 해서 그 꽃이 결코 덜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오랜 기다림 끝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더 깊은 향기와 색을 품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하고 완벽한 우주입니다. 부디 그 사실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주세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화려한 우주를 부러워하며 당신의 소중한 우주를 초라하게 만들지 마세요.

당신의 우주 안에는 다른 누구도 가지지 못한, 당신만의 고유한 빛으로 반짝이는 별들이 이미 가득합니다.

이제 그 별들을 하나씩, 소중하게 찾아내어 당신만의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을 차례입니다.

잊지 마세요. 행복은 저 멀리 우리가 쫓아가야 할 파랑새가 아닙니다. 당신이 내딛는 모든 걸음 속에, 당신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모든 숨결 속에, 바로 지금 여기에 당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마치 당신의 그림자처럼,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언제나 당신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세요.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당신 곁을 묵묵히 지켜온 그 따뜻하고 충실한 친구, 바로 당신의 내면에게 다정하게 눈길을 건네주세요. 행복은 바로 그 따뜻한 눈 맞춤 속에서, 비로소 당신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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