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바람이 창문을 가만히 두드리는 걸 보니, 어느덧 완연한 9월이네요. 책상 한편에 놓인 채 계절이 두어 번 바뀌는 동안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새하얀 스케치북. 방구석에서 조용히 먼지만 쌓여가는, 한때는 애지중지 닦았던 기타. 큰마음 먹고 사뒀지만, 첫 페이지만 굳게 접혀있는 두꺼운 책.
한때는 그것만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퇴근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게 했던 소중한 내 세상의 전부였는데 말이죠.
언제부터였을까요.
그 앞에만 서면 즐거움이라는 감정 대신,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가슴을 꾹 누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보다, 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의무감이 먼저 고개를 드는 건.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 주던 반짝이는 시간이, 이제는 또 하나의 해치워야 할 숙제 목록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 속에서 여전히 즐겁게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꾸준히 실력을 키워나가는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나만 열정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 같아 남몰래 조용히 마음이 타들어 갑니다.
‘나, 이제 이게 정말 재미없어졌나?’
‘열정 넘치던 나는 어디 가고, 내가 이렇게 변한 걸까?’
‘예전의 그 설렘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누구에게 시원하게 털어놓지도 못한 채, 혼자서만 끙끙 앓고 있었을 그 마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봅니다. 이건 당신의 이야기가 맞아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드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먼저 말해주고 싶어요.
그 좋아하던 것에 먼지가 쌓일 때
한때는 당신의 세상을 가득 채웠던 특별한 소리, 색깔, 감촉이 있었습니다.
손끝에서 처음 느껴지던 기타 줄의 팽팽하고 차가운 감각. 코드를 겨우 잡았을 때 나던 둔탁하지만 희망적인 소리.
새하얀 도화지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던 4B 연필의 사각거림. 지우개로 문지를 때 번지던 흑연의 냄새.
오븐 안에서 고소하게 부풀어 오르던 반죽의 향기. 타이머가 울리고 오븐을 열었을 때 얼굴을 덮치던 그 뜨겁고 달콤한 공기.
그 모든 순간들은 온전히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누구의 평가도, 간섭도 없는 당신만의 성역이었죠.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습니다.
그저 좋아서, 하는 동안만큼은 세상의 모든 시름과 역할을 잊을 수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하던 그 새벽과 밤들을 기억하나요?
조금 서툴러도, 결과물이 생각처럼 나오지 않아 엉성해도 마냥 웃음이 났습니다.
그건 당신의 순수한 즐거움이자,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 없는 당신만의 작은 성취였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그것들을 바라볼 때, 마음속엔 어떤 감정이 가장 먼저 지나가나요.
예전의 설렘보다는 희미한 죄책감이 먼저 느껴지진 않나요.
‘저것도 해야 하는데… 언제 하지…’ 하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말입니다.
분명히 내 손으로, 내 의지로 선택한 즐거움이었는데, 어느새 나를 평가하고 채찍질하는 또 하나의 엄격한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좋아해서 시작한 연애가 시간이 지나며 설렘은 희미해지고 의무와 책임감만 남아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도 그렇게 변해버린 걸까요.
한때 당신을 가장 빛나게 해주던 것들이, 이제는 당신을 가장 힘겹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의 열정이 식어버린 것도, 당신이라는 사람이 변해버린 것도 아니에요.
그저 당신의 마음에 ‘압박감’이라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들어와, 즐거움이 흐르던 길을 잠시 막고 있을 뿐입니다.
그 돌멩이가 무엇인지, 왜 거기에 놓이게 되었는지, 이제는 함께 들여다볼 시간입니다.
먼지 쌓인 그것들을 보며 더는 자책하지 마세요.
그 먼지는 당신의 게으름이나 변심의 증거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잠시 쉬어가고 싶다는,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작은 신호일 뿐이니까요.
‘놀이’가 ‘일’이 되어버린 순간
우리가 처음 취미의 문을 열었을 때, 그곳은 어떤 규칙도 없는 자유로운 놀이터였습니다.
넘어져도 괜찮고, 그림을 이상하게 그려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는 안전한 곳.
결과보다는 과정의 즐거움이, 성취보다는 탐험의 설렘이 가득한 곳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아늑한 놀이터에 보이지 않는 규칙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지난번보다 더 잘해야 해. 실력이 늘어야지.’
‘이왕 하는 거, 전문가처럼 보이고 싶어. 장비부터 제대로 갖춰야지.’
‘SNS에 올렸을 때 ‘좋아요’를 많이 받아야 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 달에 책 한 권은 꼭 읽어야지. 이건 나 자신과의 약속이야.’
순수한 즐거움이 있던 자리에 ‘목표’와 ‘성과’, ‘증명’이라는 깃발이 꽂히기 시작한 겁니다.
자유롭던 놀이터가 어느새 딱딱한 책상이 놓인 사무실처럼, 성과를 내야 하는 일터처럼 변해버렸습니다.
분명히 내가 세운 목표인데, 그 목표가 도리어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나를 옥죄어 옵니다.
기타를 잡으면 유튜브에서 본 연주자처럼 멋진 연주곡을 끝까지 완벽하게 완성해야 할 것 같고, 그렇지 못하는 내 손가락이 원망스럽습니다.
붓을 들면 인스타그램에서 본 작가처럼 그럴듯한 작품 하나를 그려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백지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집니다.
그렇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실망스럽고, 재능이 없는 것 같고,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탐험의 과정에서 느끼던 즐거움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만이 나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완벽해 보이는 결과물과 나의 서툴고 지저분한 과정을 비교하며 조급해합니다.
마치 회사에서 끝내야 할 업무 보고서처럼, 마감 기한이 정해진 학교 숙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속에서 순수했던 ‘놀이’가 평가받는 ‘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진심으로 즐거울 수 없습니다.
일에는 평가가 따르고, 책임이 따르고, 때로는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가 따르니까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팍팍한 일상에서 구원해주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당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이죠.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취미는 나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취미의 성과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 아늑했던 놀이터가 언제부터 차가운 사무실이 되었는지, 가만히 돌아보세요.
어쩌면 우리는 성과라는 깃발을 모두 뽑아버리고, 다시 놀이터의 흙냄새를 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해야 한다’는 마음의 잔소리
“비싼 돈 주고 산 장비인데, 뽕은 뽑아야지. 돈 아깝잖아.”
“요즘 통 연습을 안 했네. 이렇게 손 놓으면 실력 다 줄어들겠다.”
“남들은 저렇게 꾸준히 해서 결과물을 내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것도 꾸준히 못 하면, 내가 앞으로 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나는 의지박약인가 봐.”
당신의 마음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지 않나요?
마치 어깨 뒤에 딱 붙어 서서 나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잔소리꾼처럼 말이죠.
이 목소리는 꽤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척 우리를 설득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것 같아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투자한 시간과 돈, 노력을 상기시키며 우리에게 은근한 죄책감을 심어줍니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부추겨서라도 우리를 억지로 책상 앞에 앉히고, 기타를 잡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차가운 잔소리는 우리의 즐거움을 갉아먹는 가장 큰 적입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원함(Want)’과, 해야만 하는 ‘의무(Should)’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마음의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원함’은 내 안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리게 하죠. 그 과정 자체가 기쁨이고 활력입니다.
하지만 ‘의무’는 등 뒤에서 나를 떠미는 무겁고 차가운 손길과 같습니다.
억지로 한 걸음 내딛게 할 수는 있지만, 그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금세 지치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게 만듭니다.
마음의 잔소리꾼은 자꾸만 우리를 이 의무의 길로 떠밉니다. 즐거움이 아니라 효율과 성과를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합니다.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을 ‘게으름’으로, 잠시 멈춘 것을 ‘포기’로, 흥미가 떨어진 것을 ‘변심’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취미 앞에서조차 편안히 쉬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큰 피로감과 부담감을 느끼게 되죠.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노동이 되어버립니다.
이 잔소리꾼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작아지고 위축됩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될까?’
‘나는 역시 끈기와 의지력이 부족한 사람이야.’
스스로를 탓하고, 자책의 늪으로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즐거움을 잃은 것을 넘어, 자존감까지 잃게 되는 것이죠.
이제 그만, 그 목소리에게 단호하게 말해주세요.
“조용히 해줄래? 이건 평가받는 일이 아니야. 내 즐거움을 위한 시간이야.”
당신은 그 어떤 잔소리를 들을 필요도, 스스로를 닦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의 즐거움에는 그 어떤 의무도, 조건도, 자격도 붙을 수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즐거우면, 그것으로 모든 역할은 끝난 겁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냥 좋았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의 삶은 수많은 역할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누군가의 자녀, 혹은 부모. 친구들 사이에서는 믿음직한 친구. 직장에서의 아무개 대리, 혹은 팀장.
우리는 매일 그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고, 그에 걸맞은 책임과 기대를 다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진짜 내 모습이 무엇인지 헷갈릴 정도로요.
취미는 그 모든 역할과 가면을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꾸밈없는 ‘나’로 돌아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그냥 그림을 좋아하는 ‘나’였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그냥 음악을 사랑하는 ‘나’였습니다. 그 외에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었습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도 없었죠.
그저 그 행위 자체에 깊이 빠져드는 ‘나’의 모습이 좋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잊고 몰입하는 그 감각이 나를 살아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소중한 시간마저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기 시작했습니다.
‘실력 있는 아마추어’, ‘자기계발에 힘쓰는 열정적인 사람’, ‘다재다능한 취미 부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순수한 즐거움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를 증명하기 위한 또 하나의 역할이자 스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냥 좋아서 하던 마음은 희미해지고,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됩니다.
결과물은 그럴듯해야 하고, 과정은 꾸준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에 시달립니다.
결국 회사 생활의 연장선처럼, 취미 생활마저도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또 다른 무대가 되어버린 것이죠.
우리는 잃어버린 겁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요.
아무런 역할도, 책임도, 평가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몰입하던 ‘나’를.
어설픈 기타 연주에 혼자 피식 웃음 짓던 ‘나’를.
삐뚤빼뚤한 바느질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만족스러워하던 ‘나’를 말입니다.
그 꾸밈없던 ‘나’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아마도 너무 많은 역할과 책임의 무게에 지쳐, 마음속 가장 깊고 안전한 곳에 웅크리고 숨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요.
이제 그만하면 잘하고 있다고, 더는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스럽다고.
웅크리고 있는 그 ‘나’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어주세요.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그 본연의 ‘나’를 다시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증명할 필요 없는, 그냥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우리는 되찾아야 합니다.
쉼표를 찍어도 괜찮아, 마침표가 아니니까
우리는 멈추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합니다.
한번 손에서 놓으면, 영영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한번 흐름이 끊기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조함.
그동안 힘들게 쌓아온 감각이나 실력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재미가 없어져도, 숙제처럼 느껴져도 억지로 붙들고 있으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애씁니다.
마치 숨을 참고 힘겹게 달리는 것처럼, 즐거움 없이 의무감만으로 그 관계를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고, 고유의 리듬이 있습니다.
봄에 씨앗을 심고 여름 내내 뜨거운 햇볕 아래 자라나,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모든 것을 비우고 쉬는 자연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열정의 계절이 있고, 휴식의 계절이 있습니다.
어떤 것 하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샘솟고, 뜨겁게 타오르는 여름이 있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이 시들해지고, 잠시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의 겨울도 반드시 찾아옵니다.
이것은 변덕이나 나태가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의 순환입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이 마음의 겨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지로 여름인 척, 뜨거운 척하려는 데 있습니다.
지쳐버린 땅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심으려고 하니, 땅은 점점 더 힘을 잃고 황폐해질 뿐입니다.
잠시 멈추는 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완전한 끝을 의미하는 마침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긴 문장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을 준비하는 ‘쉼표’와 같습니다.
쉼표가 있어야 다음 문장을 더 힘차고 명확하게 읽어 나갈 수 있듯, 우리의 마음에도 반드시 쉼표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쉬어갈 용기입니다.
예를 들어, 기타를 케이스에 넣어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스케치북과 연필을 서랍 맨 안쪽에 넣어두는 겁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것들을 잠시 잊고 살아보는 거죠. ‘3개월 동안은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해 주세요.
이 전략이 중요한 이유는, 물리적 거리가 심리적 압박감을 해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죄책감도 덜 느끼게 되죠. 이 기간 동안 ‘이러다 영영 흥미를 잃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이 들 수 있지만, 그마저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과 그 취미의 인연이 정말 끝난 것이라면, 이 쉼표를 통해 자연스럽게 멀어질 것입니다. 그것 또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날 공간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마음에 꼭 필요한 휴식, 즉 ‘휴한기’였다면, 어느 날 문득, 길을 걷다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다시 기타가 그리워지는 날이 찾아올 겁니다. 아주 사소한 계기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날 겁니다.
그렇게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때의 감정은, 의무감에 억지로 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반갑고 애틋할 것입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처럼 말이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의 마음에 기꺼이 쉼표를 찍어주세요. 이 쉼표는 끝이 아니라, 더 깊고 성숙한 관계를 위한 소중한 숨 고르기의 시간입니다.
서툴렀던 첫 마음을 기억하나요
모든 시작에는 주체할 수 없는 설렘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어설픈 서투름이 있습니다.
기타 코드를 처음 잡았을 때, 손가락 끝이 아려오면서도 F코드를 처음으로 깨끗하게 소리 냈을 때의 그 신기했던 마음.
유튜브를 보고 원두를 갈아 첫 핸드드립 커피를 내렸을 때,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밍밍한 맛에 웃음이 터졌던 순간.
요가 첫 수업에서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아 끙끙대면서도, 마지막 사바아사나(송장 자세)에서 느꼈던 깊은 평온함.
그때는 ‘잘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완벽한 결과’를 기대하지도 않았죠.
그저 ‘해본다’는 행위 자체가 신기하고 즐거운 탐험이었습니다.
결과물은 엉망진창이었을지 몰라도, 그 과정 속에는 순수한 호기심과 발견의 기쁨, 그리고 해맑은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초심자의 행운’과 ‘초심자의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이만큼 했으면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생겨납니다. ‘초보’라는 방패막이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는 거죠.
더 이상 서투른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완벽하지 않은 과정을 견디지 못합니다.
초보자일 때는 사소한 성공 하나, 예컨대 새로운 코드 하나를 배운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했지만, 이제는 어지간한 성공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작은 실패 하나에 크게 좌절하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즐거움을 되찾는 가장 강력한 열쇠는, 바로 이 ‘첫 마음’, 즉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모든 기대와 지식, 경험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첫날로 돌아가 보는 겁니다. 일종의 의식적인 퇴행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처음 해보는 척.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그저 순수하게 만져보고 탐색해 보세요.
예를 들어, 그림에 지쳤다면 ‘멋진 풍경화를 그려야지’라는 목표 대신, ‘오늘은 그냥 파란색 물감과 친해져 보자’고 생각하는 겁니다. 종이 위에 파란색 물감을 떨어뜨려보고, 물을 섞어 번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찍어보는 등 결과에 대한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감각 자체를 즐기는 거죠.
이 방법이 효과적인 이유는, 우리의 뇌를 ‘성과 모드’에서 ‘과정 모드’로 전환시키기 때문입니다. 목표 지향적인 압박감에서 벗어나 감각적인 즐거움에 다시 연결될 수 있게 해줍니다.
기타로 아는 코드를 연주하는 대신, 그냥 아무 줄이나 퉁겨보며 울림을 느껴보세요. 요리책의 레시피를 따르는 대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냉장고 속 재료를 섞어 나만의 ‘괴식’을 만들어보세요. 웃음이 터져 나온다면 성공입니다.
목표도, 계획도, 기대도 없는 시간. 그저 그 행위와 나 자신만 존재하는 그 순수한 순간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조건 없는 재미를 다시 발견하게 될지 모릅니다.
서툴러서 즐거웠고, 몰라서 자유로웠던 그 찬란한 첫 마음을 다시 한번 만나보세요.
다시, 서툴러도 좋은 시간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투명한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그 감옥 안에서 우리는 얼어붙게 됩니다.
실수할까 봐, 망칠까 봐, 다른 사람 혹은 나 자신의 높은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선뜻 첫발을 내딛지 못합니다. 백지를, 악보를, 첫 문장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공포가 됩니다.
결국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보며 또다시 자책감에 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어쩌면 당신의 취미가 무거운 숙제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감옥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의도적으로 ‘서툴러도 좋은 시간’, ‘망쳐도 괜찮은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스스로에게 ‘오늘은 망쳐도 괜찮아. 아니, 오히려 망치는 게 목표야’라는 유쾌한 허락을 해주는 겁니다.
오늘은 멋진 작품을 완성하는 날이 아니라, 그냥 물감이랑 실컷 장난치며 친해지는 날이라고 정해보세요.
오늘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는 날이 아니라, 그냥 기타랑 어색하게 노는 날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 전략의 핵심은 목표를 아주 작고, 사소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춰보는 겁니다. 실패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도록 만드는 거죠.
예를 들어, 이런 목표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5분만 기타 줄 만져보기’ (연주가 아니라 그냥 만지기)
‘좋아하는 색깔 하나로 A4용지 전체를 아무렇게나 칠해보기’
‘책상 정리하다가 눈에 띈 책 딱 한 페이지만, 한 문장만이라도 읽어보기’
이런 목표들은 성공과 실패를 가를 수 없을 만큼 사소합니다. 그저 ‘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 남을 뿐이죠. 어떤 부담도, 압박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성공의 경험은, 완벽주의의 냉기 속에 얼어붙었던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작은 성취감이 무기력의 늪에서 빠져나올 동력이 되어줍니다.
‘아, 이게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해도 되는 거였지.’
‘그래, 이렇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였어. 거창할 필요가 없었네.’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도적으로 엉망인 결과물을 만들어보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왼손으로 내 얼굴 그려보기, 일부러 음을 틀리게 연주하며 웃어보기 등. 이는 완벽주의의 감옥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주는 유쾌하고 효과적인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잘하는 것’에만 집중해 왔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즐거움은 완벽함이 아니라 자유로움 속에 있습니다.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엉망이어도 괜찮습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그 시간을 오롯이 당신의 것으로 즐겼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시 서툴고 어설픈 나 자신을 기꺼이 허락해주세요. 그 허락 속에서 진정한 자유가 시작됩니다.
마음의 놀이터에 다른 문을 열어보기
하나의 우물만 깊게 파는 것이 미덕인 시대도 있었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분명 멋진 일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파고 있던 우물이 잠시 막혔을 때, 다른 우물을 기웃거려보는 것이 내 마음을 살리는 지혜로운 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취미를 그토록 사랑했던 이유는, 그 활동이 그 당시의 나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를 정확하게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치열하고 소란스러운 하루 끝에 조용한 위로와 집중의 시간이 필요했던 날에는 뜨개질이나 필사가 최고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몸속에 쌓인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었던 날에는 신나게 춤을 추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 완벽한 해답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고여있지 않고 계속해서 변합니다. 마치 날씨처럼, 계절처럼요.
어제 나에게 필요했던 것과,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정적인 활동에서 깊은 위안을 얻었다면, 지금은 동적인 활동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혼자 하는 활동에 지쳤다면,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활동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지금 하고 있는 취미가 더 이상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그 취미 자체가 나빠서도, 당신의 열정이 식어서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저 지금의 내 마음이 다른 종류의 즐거움, 다른 종류의 자극을 원하고 있다는 솔직한 신호일 뿐입니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취미를 잠시 내려놓는 것이, 마치 오랜 친구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이것마저 그만두면 나는 뭐가 될까’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수도 있죠.
하지만 이것은 배신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더 넓고 깊게 탐험하는 자연스러운 여정입니다.
마음의 놀이터에 굳게 닫혀 있던 다른 문을 한번 열어보는 겁니다. 지금껏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문을요.
예를 들어, 늘 그림만 그리던 사람이었다면, 평소에는 전혀 관심 없던 분야인 ‘목공’이나 ‘클라이밍’ 원데이 클래스를 덜컥 신청해 볼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근육과 감각을 사용하는 경험은 뇌에 신선한 자극을 줍니다.
꼭 거창한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좋습니다. 동네를 산책하며 처음 보는 골목길을 탐험하는 것도,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무작위로 들어보는 것도 훌륭한 탐험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자극에 나를 열어두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탐험의 과정은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잊고 있던 순수한 호기심과 설렘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잠시 멀어졌던 예전 취미가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분야에서 얻은 영감이 예전 취미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죠.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의 새로운 즐거움을,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마음은 하나의 놀이기구만 있는 작은 놀이터가 아닙니다. 수많은 문과 가능성이 숨겨져 있는 거대한 테마파크와 같습니다.
오늘은 어떤 새로운 문을 열어볼까요?
오늘의 마음 날씨를 살펴봐요
우리는 매일 아침 창밖을 보거나 앱을 통해 날씨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옷을 고릅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챙기고 방수되는 신발을 신고, 햇볕이 쨍쨍한 날에는 가벼운 옷을 입고 선크림을 바르죠. 날씨에 맞춰 행동을 조절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마음 날씨’를 하루에 얼마나 자주 살피고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에도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때로는 예고 없이 폭풍우가 치는 날이 있습니다. 에너지와 컨디션은 매일, 매시간 달라집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섬세한 마음 날씨를 무시한 채, 매일 똑같은 활동을, 똑같은 강도로 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반소매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에너지가 넘치고 의욕이 활활 타오르는 마음이 ‘맑은 날’에는 조금 어렵고 도전적인 과제를 하는 것이 큰 즐거움과 성취감을 줄 수 있습니다. 평소 미뤄뒀던 어려운 곡을 집중해서 연습하거나, 복잡한 레시피에 도전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야근과 스트레스로 몸도 마음도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똑같은 과제를 들이미는 것은, 마음에 억지로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지우는 것과 같습니다. 취미가 즐거움이 아닌 고문이 되는 순간이죠.
그런 날에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단순한 활동이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엉킨 뜨개실을 풀거나, 멍하니 물감 번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요.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취미 활동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나를 돌보는 ‘다정한 위로’가 되려면 매일, 혹은 매 순간 나의 마음 날씨를 섬세하게 살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취미 활동을 시작하기 전,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물어봐 주세요.
‘오늘 나의 마음 에너지는 100% 중에 몇 퍼센트 정도일까?’
‘지금 내 마음은 조용한 위로를 원하고 있을까, 아니면 신나는 활력을 원하고 있을까?’
‘머리를 복잡하게 쓰고 싶은 날일까, 아니면 머리를 텅 비우고 싶은 날일까?’
마음이 ‘오늘은 정말 쉬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그 목소리를 판단하지 말고 기꺼이 따라주세요. 마음이 ‘갑자기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라고 외친다면, 그 충동적인 호기심을 따라가 주세요.
나의 마음 날씨에 맞는 활동을 유연하게 선택할 때, 취미는 더 이상 부담스러운 숙제가 아니라, 나를 가장 잘 아는 다정한 친구이자 훌륭한 마음 관리 도구가 되어줄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 날씨를 가장 잘 아는 기상캐스터는 TV 속의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당신은 당신의 시간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리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 모든 시간과 감정, 즐거움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을요.
취미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취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림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그림을 잘 그려서 그림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엄청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든 규칙을 바꾸고, 기준을 허물고, 새로운 판을 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 한 시간씩 연습해야 한다’는 규칙을 내가 만들었다면, ‘일주일에 한 번, 딱 10분만 해도 괜찮다’는 새로운 규칙으로 바꿀 수 있는 권한도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결과물이 SNS에 올릴 만큼 근사해야 한다’는 높은 기준을 내가 세웠다면, ‘과정만 즐거우면 결과는 쓰레기통에 버려도 그만이다’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당신은 당신 시간의, 당신 즐거움의 완전한 주인입니다.
그 누구의 허락도, 인정도, 동의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을 자유.
야심 차게 시작했다가 중간에 흥미를 잃고 그만둘 자유.
원래의 방법 대신 완전히 다른 이상한 방식으로 즐겨볼 자유.
이 모든 자유가 당신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 자유를 포기하지 마세요.
그 자유를 온전히, 그리고 마음껏 누리세요.
더 이상 스스로를 ‘꾸준함’, ‘성실함’, ‘재능’이라는 보이지 않는 틀 안에 가두지 마세요.
그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고 숙제처럼 느껴진다면, 잠시 책을 덮어도 괜찮습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젠가 다시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 때, 그때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영원히 그 마음이 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사이 훨씬 더 재미있는 다른 책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당신의 인생에 찾아온 멋진 선물입니다.
당신의 즐거움은 오직 당신만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대신 정의해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에 당신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당신의 행복을 내어주지 마세요.
어떤 활동이 더 이상 당신을 진심으로 웃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당신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미련 없이 놓아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진정으로 즐거운가?’
그 질문에 대한 당신의 솔직한 답이, 당신의 모든 선택의 유일한 이유가 되기를 바랍니다.
방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던 그것들을 이제는 조금 다른 눈으로, 조금 더 다정한 눈으로 바라봐 주세요. 그것들은 당신을 다그치는 밀린 숙제 꾸러미가 아니라, 한때 당신에게 가장 큰 기쁨과 위로를 주었던 오래된 친구입니다. 사람 사이에도 그렇듯, 친구 사이에도 때로는 거리가 필요하고, 각자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마음의 밭에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매년 똑같은 작물을 똑같은 자리에 심으면 땅의 힘이 닳아 없어지는 ‘연작 장해’가 생기듯, 우리의 마음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산해내라는 압박을 받으면 지쳐버리고 맙니다. 열정의 토양이 메마르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아무것도 심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 그냥 밭을 묵혀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 동안 땅은 스스로 비바람을 맞고 햇볕을 쬐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의 활동을 통해 다시 기름진 힘을 되찾게 될 거예요.
어쩌면 당신의 마음 밭도 지금 그런 ‘휴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메마른 땅을 보며 자책하지 마세요. 억지로 무언가를 심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냥 가만히, 당신의 마음이 스스로 힘을 되찾을 때까지 온전히 믿고 기다려주세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다시 무언가를 심고 싶다는 아주 작은 씨앗 같은 마음이 싹틀 때. 그때,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첫 삽을 뜨면 됩니다. 그때의 즐거움은 의무감과 압박감 속에서 억지로 얻어내려던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고, 단단하고, 소중하게 느껴질 테니까요. 당신의 즐거움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더 깊어지고 단단해지기 위해, 잠시 땅속 깊은 곳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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