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날이 있습니다.
분명히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입은 습관처럼 괜찮다고 말해버립니다.
친구와의 약속, 연인과의 대화, 가족과의 식사 자리.
우리는 문득 마음이 불편해지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켜버립니다.
‘이 말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질 거야.’
‘나만 조금 참으면 모두가 편한데.’
이 익숙한 생각들이 쇠사슬처럼 나를 옭아매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또 한 번, 나는 내 마음 대신 관계의 평화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모두를 위해 내가 희생하고 참았는데, 관계는 더 좋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 공허합니다. 알 수 없는 서운함만 차곡차곡 쌓여갈 뿐입니다.
웃고 있는데도 진짜로 웃는 게 아니고, 함께 있는데도 외롭습니다.
가끔은 이런 나를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기도 합니다.
‘나만 참으면 돼.’ 이 생각, 정말 우리를 위한 최선일까요?
마음속에 둑을 쌓는 일
우리의 마음을 잔잔한 강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평소에는 평화롭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관계 속에서 서운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그 강물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넣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요.
처음에는 작은 돌멩이라 별 티가 나지 않습니다.
강물은 그 돌멩이를 비켜서 여전히 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힘든 일이 생깁니다.
‘이번에도 내가 참자.’ 하며 더 큰 돌을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돌멩이와 바위들이 하나둘 쌓여, 어느새 내 마음의 강에는 거대한 둑이 생겨납니다.
이 둑의 이름은 ‘인내’ 혹은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튼튼하고 안전해 보입니다.
감정의 강물이 넘치지 않도록 잘 막아주고 있으니까요.
덕분에 관계는 아무 문제 없이 평온한 것처럼 유지됩니다.
갈등도 없고, 다툼도 없습니다. 모두가 이 평화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만든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있습니다.
강물은 흘러야 생명력을 갖는다는 사실을요.
흐르지 못하고 둑 뒤에 갇힌 물은 점점 차가워집니다.
깊이를 알 수 없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그 맑던 물은 썩기 시작합니다.
나의 솔직한 감정, 서운함, 속상함, 원하는 것들.
이 모든 것이 흐르지 못하고 갇혀버린 것입니다.
상대방은 그저 평화로운 강의 표면만 볼 뿐입니다.
그 아래, 거대한 둑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내가 정말로 괜찮다고 믿습니다.
내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동안 둑 뒤의 수위는 계속해서 높아집니다.
내가 참아낸 감정의 무게만큼, 물은 점점 더 거세게 둑을 압박합니다.
결국 이 둑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 정말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갑자기 터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때 터져 나온 것은 그냥 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갇혀 썩어버린, 거대한 분노와 원망의 탁류입니다.
관계는 그 탁류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버립니다.
나만 참으면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그 평화는 산산조각이 납니다.
내 마음은 거짓말을 알아챕니다
우리가 “괜찮아”라고 말할 때, 입은 그럴듯하게 움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정직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은 돌덩이 하나를 얹은 것처럼 무거워지고,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옵니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거나,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옵니다.
이유 없이 기운이 없고, 좋아하던 일에도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나는 지금 괜찮지 않아. 내 목소리를 들어줘.’ 하고 외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호를 애써 무시합니다.
‘피곤해서 그래.’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래.’ 하며 다른 이유를 찾아냅니다.
내 마음의 진짜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이지요.
마치 울고 있는 아이를 못 본 척하는 부모처럼요.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무시할 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과의 연결을 끊어버립니다.
나와 나 사이가 멀어지는 것, 그것만큼 슬픈 일은 없습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됩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관계의 평화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내 마음과 멀어진 사람은 타인과도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나 자신과도 소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깊은 소통을 할 수 있을까요?
“괜찮아”라는 말은 때로 관계를 위한 윤활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순간에 사용하는 만병통치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나와 상대방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듭니다.
솔직한 감정이 오고 가야 할 자리에, 예의 바르고 차가운 벽돌이 쌓이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웃고 있는 내 모습 뒤에 숨겨진 진짜 내 마음을 볼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립니다.
그들은 내가 만든 ‘괜찮은 사람’이라는 가면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의 정체입니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진짜 나를 보여주지 못해 혼자인 기분.
사랑하는 사람 옆에 누워있지만, 마음은 저 멀리 외딴섬에 혼자 남겨진 기분.
거짓말은 결국 나를 가장 먼저 속이고, 가장 깊이 병들게 합니다.
나를 속이는 일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내가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닌지조차 헷갈리게 됩니다.
내 감정의 나침반이 고장 나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대
우리가 꾹 참을 때, 우리 마음속에는 아주 작은 기대 하나가 싹틉니다.
‘언젠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배려하는 걸, 상대방도 알아줄 거야.’
‘말하지 않아도, 내 표정만 보고도 내 힘듦을 눈치채주지 않을까?’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위험한 기대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나의 감정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벽하게 읽을 수 있는 초능력자는 없다는 사실을요.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이라 할지라도, 내가 말하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웃으며 “괜찮아”라고 말하면, 그들은 정말 내가 괜찮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이거나 눈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나의 표현을 믿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참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서운함이 쌓여갑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데 그것도 몰라주다니.’
기대는 실망으로, 실망은 원망으로 변해갑니다.
나 혼자 참고, 나 혼자 기대하고, 나 혼자 실망하고, 나 혼자 원망하는 악순환입니다.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 관계가 아주 평화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쌓아온 원망을 터뜨렸을 때, 그들은 너무나 당황합니다.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나는 정말 네가 괜찮은 줄 알았어.”
이런 반응 앞에서 우리는 더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결국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내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표현할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겼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놓고, 밖에서 누군가 그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린 셈입니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오직 나에게만 있는데도 말입니다.
건강한 관계는 서로의 마음을 추측하는 ‘눈치 게임’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대화’입니다.
내가 먼저 내 마음을 표현해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내 세상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나를 알아주길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무거운 갑옷
우리는 왜 그렇게 참는 걸까요?
많은 경우,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까다로운 사람,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거절을 잘 못하고, 싫은 소리를 못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무거운 갑옷과 같습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움받지 않기 위해 입는 갑옷입니다.
이 갑옷은 너무나 무겁고 답답해서, 그 안의 진짜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습니다.
늘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분을 살피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립니다.
정작 나 자신의 마음을 돌볼 힘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점점 나 자신에게 나쁜 사람이 되어갑니다.
‘나만 참으면 돼’라는 생각은 이 갑옷을 더욱 단단하게 만듭니다.
갈등을 피하고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갈등을 피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릅니다.
참는 것은 문제를 잠시 땅속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은 보이지 않아 편할지 몰라도, 그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땅속에서 더 크게 곪아갑니다.
언젠가는 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좋은 관계’는 갈등이 아예 없는 관계가 아닙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는 관계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솔직한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과정 속에서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참기만 하는 관계에서는 이런 성장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늘 한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모래성과 같아서, 작은 파도에도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참고 있나요?
나의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이 나를 떠날까 봐 두려운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 관계는 어차피 건강하지 않은 관계일 수 있습니다.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곁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나를 아끼는 사람은 나의 솔직한 감정 또한 존중해 줄 것입니다.
‘착한 사람’ 갑옷을 벗어 던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감정은 날씨와 같아요
우리의 감정을 하늘의 날씨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어떤 날은 햇살이 쨍쨍하고, 어떤 날은 구름이 잔뜩 낍니다.
어떤 날은 시원한 바람이 불고, 어떤 날은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날씨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비가 온다고 해서 하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은 비가 오는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 즐거움 같은 맑은 날의 감정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슬픔, 분노, 서운함, 질투 같은 흐린 날의 감정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고 소중한 내 마음의 일부입니다.
이 감정들은 지금 내게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등과 같습니다.
서운함은 내가 존중받고 싶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분노는 나의 경계선이 침범당했다는 경고일 수 있습니다.
슬픔은 내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었거나, 위로가 필요하다는 신호입니다.
이런 감정들을 나쁘다고 여기고 억지로 참는 것은, 비를 억지로 내리지 못하게 막는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막아둔 감정의 먹구름은 언젠가 거대한 폭풍우가 되어 모든 것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흐린 날의 감정들을 나쁜 것으로 여기지 마세요.
그 감정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돌봐주고 알아주어야 할 내 마음의 목소리입니다.
‘아, 내가 지금 서운하구나.’
‘화가 많이 났네. 이유가 뭘까?’
이렇게 내 감정의 날씨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큰 위로를 받습니다.
내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이름 붙여주고 인정해 주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속에 비가 내릴 땐, 억지로 해를 띄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조용히 우산을 펴고, 빗소리를 들어주세요.
비가 그치고 나면 하늘은 더 맑고 깨끗해집니다.
땅은 더 단단해지고요.
나의 다양한 감정들을 모두 허락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모두 나 자신이니까요.
아주 작은 표현의 시작
‘나만 참으면 돼’라는 습관을 바꾸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쓰지 않던 근육을 다시 움직이려는 것처럼 어색하고 힘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거창한 변화를 시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라는 한 단어를 말하기 위해 수없이 옹알이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의 말을 표현하는 옹알이를 시작해 보는 겁니다.
친구와 메뉴를 정할 때, “나는 사실 파스타가 더 먹고 싶어”라고 말해보기.
연인이 영화를 고를 때, “그 영화도 좋지만, 나는 이 영화에 더 마음이 가”라고 이야기해보기.
너무나 사소해서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싶은 것들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작은 성공 경험들이 쌓여 ‘내 의견을 말해도 괜찮구나’라는 믿음을 만들어줍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가장 좋은 합의점을 찾아가는 건강한 과정의 첫걸음입니다.
표현하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나 전달법(I-message)’을 연습해 보세요.
상대방을 비난하는 ‘너(You)’ 대신, 나의 상태와 감정을 설명하는 ‘나(I)’로 시작하는 대화법입니다.
“너는 왜 항상 약속에 늦어?” (X)
→ “네가 늦게 오면, 나는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되고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게 느껴져.” (O)
“너는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X)
→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는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속상해.” (O)
이렇게 ‘나’를 주어로 이야기하면, 상대방은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나의 상황과 감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이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잠시 숨을 고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세요.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나의 권리야. 나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어.’
한 번의 용기가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시도는 내 마음속에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아주 조금 여는 것과 같습니다.
그 틈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고, 관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입니다.
거절은 미움이 아닌 존중입니다
참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거절’입니다.
부탁을 거절하면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게 되거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할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무리한 부탁인 줄 알면서도 억지로 수락하고, 혼자 끙끙 앓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거절은 관계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나의 시간, 에너지, 감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해야 할 소중한 자원입니다.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다 보면, 이 자원은 금방 바닥나 버립니다.
정작 나를 위해, 그리고 내가 정말 도와주고 싶은 사람을 위해 쓸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부탁을 억지로 들어주었을 때, 그 결과가 좋을 리 없습니다.
결국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원망하게 되고, 관계는 보이지 않게 조금씩 틀어집니다.
거절은 상대방이라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부탁’이 지금 나의 상황과 맞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뿐입니다.
‘너는 싫지만, 너의 부탁은 좋아’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너는 좋지만, 지금 너의 부탁은 들어주기 어려워’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거절할 때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솔직하고 단호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내가 다른 일로 여유가 없어서 도와주기 어려울 것 같아.”
“나를 생각해서 제안해 준 것은 정말 고마운데, 그건 내 생각과 조금 다른 것 같아.”
변명을 길게 늘어놓거나 결정을 미루는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더 큰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나의 거절을 존중해 줄 것입니다.
만약 나의 거절에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나를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도구로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고, 지속될수록 나를 병들게 할 뿐입니다.
거절은 나 자신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보호막입니다.
나의 경계선을 명확히 하고, ‘나는 여기까지 도울 수 있고, 이 이상은 어렵습니다’라고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 경계선이 명확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나를 존중하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한 용기 있는 거절은, 결국 나와 상대방 모두를 위한 진정한 배려가 될 수 있습니다.
혼자만의 동굴이 필요할 때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피고 나를 억누르다 보면, 마음의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되어 버립니다.
이럴 때는 잠시 관계로부터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나만의 동굴로 들어가 지친 마음을 돌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종종 혼자 있는 것을 ‘외로움’과 연결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고독’은 외로움과 다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소모된 에너지를 다시 채우고, 흩어진 나를 다시 하나로 모으는 아주 중요한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 마음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춰도 좋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좋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거나,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밤새 읽는 것도 멋진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스마트폰도 잠시 멀리 두고,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키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고요함 속에서 비로소 들리지 않던 내 마음의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요즘 많이 지쳤구나.’
‘그때 그 사람이 한 말에 내가 상처를 받았었네.’
‘나는 사실 이걸 원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나 자신과 대화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기 돌봄의 시작입니다.
충분히 휴식하고 에너지를 채운 뒤에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건강한 모습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내 중심을 단단히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배터리가 거의 없는 휴대폰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꺼져버리지만, 완전히 충전된 휴대폰은 오랫동안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이전에, 나 자신에게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주세요.
나에게 기꺼이 혼자만의 동굴을 허락해 주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내 감정의 주인은 바로 나
우리는 종종 내 감정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너 때문에 화가 나.’
‘너 때문에 슬퍼.’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은 편할지 모릅니다.
내 감정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내 감정의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내 기분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면 기쁘고, 나를 서운하게 하면 하루 종일 우울합니다.
내 감정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만 참으면 돼’라는 생각 역시, 내 감정의 주도권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관계의 평화를 위해 내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그 행동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감정을 느낄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물론 상대방의 행동이 감정의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을 내 안에서 어떻게 키우고 다룰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무례한 말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구나. 내 가치가 저 사람의 말 한마디로 결정되는 건 아니야.’ 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반면, ‘내가 뭘 잘못했나? 역시 나는 부족한 사람인가 봐.’ 하며 하루 종일 그 말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상황은 같지만, 나의 선택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내 감정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이나 외부 상황에 내 행복을 맡기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내 마음의 날씨를 다른 사람이 좌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관계의 안정에 기대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은 것부터 연습해 볼 수 있습니다.
불쾌한 감정이 들 때,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세요.
‘이 감정은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지금 이렇게 느끼는 진짜 이유는 뭘까?’
‘이 감정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렇게 내 감정을 돌보는 주체적인 연습을 통해, 우리는 서서히 내 마음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수 있습니다.
누가 흔들어도 쉽게 뽑히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단단한 내면을 갖게 될 것입니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을 여는 용기
참는 것에 익숙해진 마음은 오랫동안 닫혀 있던 방과 같습니다.
어둡고, 공기는 탁하며,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처음에는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바깥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나 차가운 바람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방에 계속 머무르면, 우리는 점점 생기를 잃어갑니다.
햇살의 따스함도, 신선한 공기의 상쾌함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나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이 굳게 닫힌 방의 창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 창문을 열면,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실 수 있습니다.
차가운 바깥 공기에 몸이 움츠러들 수도 있습니다.
어색하고, 두렵고, 다시 창문을 닫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용기’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변화에 따르는 불편함과 두려움을 감수할 용기 말입니다.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이 당황하거나 심지어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늘 평온했던 관계에 어색한 기류가 흐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것은 관계가 망가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드디어 건강해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입니다.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오는 환기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방 안의 먼지가 걷히고,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진짜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창문을 계속 열어두면, 그 방은 더 이상 어둡고 축축한 공간이 아닐 것입니다.
햇살이 가득 들어와 따뜻하고, 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머무는 살아있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나의 진짜 마음, 진짜 욕구가 존중받는 관계.
가면을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해도 사랑받을 수 있는 관계.
이런 관계는 ‘나만 참으면 돼’라는 생각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작은 창문을 여는 용기,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당신의 마음의 방에도 이제 햇살이 들어올 시간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 밭에 물을 주느라 바빴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시들지 않도록, 그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도록 나의 물뿌리개를 늘 그들을 향해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정작 나의 마음 밭은 바싹 말라 갈라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요.
이제는 그 물뿌리개를 나 자신에게로 돌려줄 시간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나의 밭에 먼저 예쁜 꽃과 튼튼한 나무를 키워내는 일입니다.
내가 행복과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시원한 그늘과 향기로운 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나를 돌보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가장 지혜로운 사랑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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