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세상이 모두 잠든 듯 고요한 시간입니다.
가만히 누워 하루를 마무리하려는데,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습니다.
잊고 있던 과거의 한 장면이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겁니다.
사람들 앞에서 바보같이 굴었던 내 모습.
서툴러서 망쳐버렸던 중요한 순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던 미숙한 말 한마디.
마치 어두운 방에서 혼자 낡은 흑백영화를 보는 기분입니다.
화면 속 주인공은 하필이면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의 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도 그 장면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재생됩니다.
‘그때 왜 그랬을까?’
‘조금만 더 잘하지.’
‘정말 한심하다.’
날카로운 말들이 가시가 되어 잠 못 드는 당신의 밤을 찌릅니다.
시간은 이미 한참이나 흘렀습니다.
어쩌면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 과거의 한복판에 홀로 남아, 가장 가혹한 재판관이 되어 자신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 재판을 잠시 멈추고, 과거의 당신을 위해 변호를 시작하려는 변론서입니다.
세상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어쩌면 당신 자신조차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던, 그 아이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어제의 나에게 보내는 답장 없는 편지
당신의 마음속에는 아주 오래된 우체통이 하나 있습니다.
그 우체통에는 매일같이 편지가 쌓입니다.
보내는 사람은 언제나 ‘오늘의 나’.
받는 사람은 언제나 ‘어제의 나’.
편지의 내용은 늘 비슷합니다.
왜 그렇게밖에 못했냐는 질책.
더 현명하게 행동하지 그랬냐는 아쉬움.
그때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그 편지들은 답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는 이미 그 시간 속에 갇혀, 오늘의 당신에게 어떤 변명도, 설명도 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묵묵히, 오늘의 당신이 보내는 모든 비난을 온몸으로 맞고 있을 뿐입니다.
가장 가까운 존재인 당신에게서 날아오는 가장 아픈 돌을 말입니다.
물론 당신은 좋은 의도로 편지를 썼을지 모릅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려는 채찍질이었을지도요.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세요.
매일같이 비난의 편지만 받는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그 아이는 점점 더 작아지고, 목소리를 잃고, 자신감을 잃어갑니다.
결국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됩니다.
어차피 또 혼날 테니까요.
당신의 과거는 당신의 일부입니다.
과거의 나를 미워하는 것은, 결국 지금의 나를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그만 편지를 보내는 것을 멈춰보는 건 어떨까요?
대신 그 낡은 우체통을 열어, 그동안 가득 쌓여있던 편지들을 꺼내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편지들 속에서 홀로 울고 있었을, 어리고 서툴렀던 당신의 모습을 가만히 안아주는 겁니다.
그 아이는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이해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 아이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당신이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온몸으로 시간을 버텨내 준 당신의 가장 오랜 친구입니다.
답장 없는 편지로 상처 주는 대신, 이제는 따뜻한 말을 건네주세요.
‘괜찮아, 그럴 수 있었어.’ 라고.
그날의 선택은 ‘최선’이 아니라 ‘유일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과거를 돌아보며 ‘더 나은 선택’을 상상합니다.
‘A가 아니라 B를 선택했더라면…’
‘그 말을 하는 대신 침묵했더라면…’
마치 그 순간, 내 앞에 여러 개의 선택지가 놓인 뷔페 식당에 있었던 것처럼 착각합니다.
나는 얼마든지 더 좋은 음식을 고를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맛없는 음식을 고른 것처럼요.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그날의 당신에게로 잠시 돌아가 봅시다.
지금의 지식, 경험, 여유를 모두 내려놓고, 오직 그때의 마음으로만 말입니다.
아마 마음은 불안으로 요동치고 있었을 겁니다.
경험은 턱없이 부족했고, 세상을 보는 눈은 지금보다 훨씬 좁았을 겁니다.
상황은 당신을 압박하고, 시간은 촉박하게 흘러갔을지 모릅니다.
마치 짙은 안갯속을 걷는 사람처럼, 발 바로 앞 한 걸음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동서남북 모든 방향을 고려해 가장 좋은 길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요?
그때 당신이 내린 결정은,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 혼란과 불안 속에서 당신의 눈에 보였던 ‘유일한 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아서 택한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지금의 당신이 보기에 그 문이 틀린 길이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 문을 열고 나온 덕분에 당신은 ‘여기는 아니구나’라는 것을 배웠으니까요.
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과거의 당신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는 뷔페 식당에서 잘못된 음식을 고른 게 아닙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유일한 음식을 붙잡고, 어떻게든 굶주림을 면하려고 애썼던 것뿐입니다.
그 애씀을, 그 절박함을 알아주세요.
그것이 바로 당신이 과거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입니다.
그 선택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 순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기억은 완벽한 녹화 영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마치 그 순간을 고화질 영상으로 다시 보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정확한 장치가 아닙니다.
기억은 사실 ‘재편집된 다큐멘터리’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감독은 바로 ‘지금의 나’입니다.
지금의 내가 가진 감정, 가치관, 지식이 필터가 되어 과거의 사건을 다시 해석하고 편집합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라도, 기분이 좋을 때 떠올리는 것과 우울할 때 떠올리는 것은 전혀 다른 색깔을 띱니다.
특히나 후회스러운 기억은 더욱 심하게 왜곡됩니다.
지금의 당신은 그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성숙해졌습니다.
그 성숙해진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보니, 그때의 행동이 유독 더 어설프고 바보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대학생이 초등학생 시절에 쓴 일기장을 보며 ‘이렇게 유치한 글을 썼다니!’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는 그게 그 아이의 세상이었고, 그 아이의 언어였으니까요.
당신은 자꾸만 현재의 잣대를 과거로 가져가, 불공평한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당신이 가진 ‘정답’을, 그때의 당신은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당신은 그저 그 나이, 그 상황, 그 마음의 크기만큼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그 순간의 진실이었습니다.
기억 속에서 자신의 실수를 자꾸만 확대 재생산하지 마세요.
당신의 기억은 이미 ‘현재’라는 감독에 의해 편파적으로 편집된 영상일 뿐입니다.
그 영상 속에서 당신은 실제보다 더 크게 넘어졌고, 주변 사람들은 실제보다 더 당신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후회라는 감정이 그렇게 편집하도록 시켰으니까요.
이제 그만 그 영상을 끄고, 편집자인 당신 자신에게 말해주세요.
‘이건 사실이 아닐 수 있어. 이건 지금 내 마음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야.’ 라고요.
기억의 감옥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 주세요.
그 흉터가 없었다면 지금의 지도는 없었을 겁니다
넘어져서 생긴 무릎의 흉터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요?
‘아, 이때 정말 아팠지.’
‘이 흉터 때문에 반바지를 입기 싫어.’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이 흉터 덕분에 나는 다음에 어디서 조심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지.’
과거의 실수나 상처는 우리 마음에 남은 흉터와 같습니다.
볼 때마다 아프고, 때로는 감추고 싶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더 깨끗하고 완벽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흉터들은 정말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흉터들이 지금 당신이 걷는 길을 알려주는 소중한 ‘지도’가 되어주지는 않았을까요?
사람에게 크게 상처받았던 경험. 그 흉터 덕분에 당신은 사람을 더 신중하게 대하는 법을 배웠을 겁니다.
누가 진심이고 누가 거짓인지 구분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큰 실패로 좌절했던 경험. 그 흉터 덕분에 당신은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을 배웠을 것이고, 작은 성공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겁니다.
미숙한 선택으로 무언가를 망쳤던 경험. 그 흉터 덕분에 당신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는 지혜를 얻었을 겁니다.
우리가 ‘실수’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은 삶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점들이었습니다.
그 점들이 없었다면 당신의 지도는 텅 비어 있었을 겁니다.
어디가 위험한지, 어디가 안전한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백지였을 겁니다.
과거의 당신은 넘어진 것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길을 탐색하며, 미래의 당신을 위해 지도에 표시를 남겨준 것입니다.
‘여기는 절벽이니 조심해.’
‘이 길은 늪이니 들어가지 마.’
그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것은 실패의 낙인이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용감하게 삶을 탐험했는지를 보여주는 훈장입니다.
그 흉터들이 모여, 지금 당신의 단단한 마음과 지혜로운 길을 만들어주었으니까요.
당신은 빌딩이 아니라 나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성장을 ‘빌딩’을 짓는 것에 비유하곤 합니다.
1층을 쌓고, 2층을 쌓고, 눈에 보이게 차곡차곡 올라가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과거의 어떤 실수는, 공들여 쌓은 빌딩의 한 층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책합니다.
‘이 실수만 아니었으면 벌써 10층은 지었을 텐데.’
‘저 바보 같은 행동 때문에 내 빌딩은 아직도 3층이야.’
하지만 우리의 삶과 성장은 빌딩을 짓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나무’를 키우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나무는 어떻게 자라나요?
씨앗을 심으면, 한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땅 위에서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땅속에서는 조용하지만 위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씨앗은 껍질을 깨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깊이, 더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가뭄을 견딜 수 있도록 자신을 단단히 붙드는 시간입니다.
과거 당신이 했던 실수, 방황, 멈춤의 시간들은 어쩌면 빌딩의 층을 허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당신의 내면은 더 깊고 단단해졌습니다.
어떤 실수는 당신을 더 겸손하게 만들었고, 어떤 아픔은 당신이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어떤 방황은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당신은 아무것도 성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남들은 쑥쑥 빌딩을 올리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 불안했을 겁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 나무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쓰러집니다.
당신은 그저, 더 높이 자라기 위해, 더 많은 비바람을 견디기 위해, 누구보다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과거의 실수 앞에서 자책하지 마세요.
그것은 성장의 실패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성장의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나무는 그 어떤 폭풍우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마음속 법정의 유일한 판사는 당신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매일 재판이 열립니다.
피고인은 ‘과거의 나’.
검사는 ‘현재의 나’.
그리고 판사도 ‘현재의 나’입니다.
검사인 당신은 날카롭게 기소합니다.
‘피고인은 그때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해서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피고인은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음에도, 나태함으로 그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증거는 왜곡된 기억들이고, 증인은 당신의 현재 가치관입니다.
피고인석에 앉은 ‘과거의 나’는 아무런 변호도 받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판사인 당신은 엄숙하게 판결을 내립니다.
‘유죄. 평생 후회하고 반성하는 형에 처한다.’
이 재판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검사와 판사가 같은 사람이고, 피고인에게는 변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결과는 언제나 정해져 있습니다.
이제 그만 그 재판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역할을 바꿔야 합니다.
당신은 검사나 판사가 아니라, ‘변호인’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나를 변호하는 유일한 변호인.
그의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겁니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재판장님. 그는 너무 긴장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습니다.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 극심한 번아웃 상태였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마음의 에너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회가 아니라 휴식이었습니다.’
이렇게 그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겁니다.
판사인 당신에게, 검사인 당신에게, 그의 사정을 설명해주는 겁니다.
처음에는 어색할지 모릅니다.
늘 비난만 해왔으니까요.
하지만 한번 시작해보세요.
과거의 나를 위한 변호인이 되어, 그의 편에 서주세요.
세상 모두가 그를 비난해도, 당신만큼은 그의 유일한 편이 되어주세요.
그렇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다 보면, 마음속 법정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올 겁니다.
‘유죄’라는 판결 대신, ‘정상참작’, 그리고 마침내 ‘무죄’라는 따뜻한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될 겁니다.
용서는 지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과거의 나를 용서하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종종 오해를 합니다.
마치 그 실수를 없었던 일처럼, 깨끗하게 지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힘이 듭니다.
‘어떻게 그걸 잊어? 이렇게 생생한데?’
‘그 실수가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이 이렇게 큰데, 어떻게 없던 일로 해?’
하지만 용서는 ‘삭제’가 아닙니다.
컴퓨터 파일처럼 휴지통에 넣고 영구 삭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오히려 ‘받아들임’에 가깝습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 나는 그런 실수를 했었지.’
‘그때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
이렇게, 그 사건과 그때의 나를 내 삶의 일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내 몸의 흉터처럼요.
흉터를 지울 수는 없지만, 그것이 내 몸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더 이상 볼 때마다 괴로워하거나 감추려고 애쓰지 않고, 그냥 ‘나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를 억지로 잊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애쓸수록 그 기억은 더 선명하게 떠오를 뿐입니다.
마치 물에 뜬 공을 억지로 누르려고 하면, 더 강하게 튀어 오르는 것처럼요.
대신, 그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그냥 허용해보세요.
‘아, 또 그 생각이 나는구나.’
그리고 그 생각과 함께 떠오르는 감정들, 부끄러움, 후회, 괴로움도 가만히 바라봐 주세요.
그 감정들은 당신을 공격하려는 적이 아닙니다.
그저 ‘나 좀 돌봐주세요’ 라고 외치는, 과거에 갇힌 당신 마음의 소리일 뿐입니다.
그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래, 부끄러웠구나. 많이 후회됐구나.’ 하고 알아주기만 해도, 감정의 파도는 조금씩 잔잔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입니다.
용서는 거창한 이벤트가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비난 대신 이해를 선택하는 작은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우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는 것입니다.
‘만약에’의 방향을 살짝 바꿔보는 것
우리는 후회의 늪에 빠질 때, 습관처럼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 사람과 잘 지낼 텐데.’
‘만약 그때 그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지금 더 안정적일 텐데.’
이 ‘만약에’는 언제나 과거를 향해 있고, 결과는 항상 지금보다 더 좋은 환상 속의 미래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바꾸지 못한 나를 자책하게 만들 뿐, 어떤 해답도 주지 않으니까요.
이제 그 ‘만약에’의 방향을 아주 살짝만 바꿔보면 어떨까요?
과거를 부정하는 대신, 그 과거를 긍정하는 방향으로요.
‘만약 그때 그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일이라면?’
‘만약 그때 그 아픔이, 내가 더 깊은 사람이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면?’
‘만약 그때의 그 선택 덕분에,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이라면?’
이 질문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관점을 선물합니다.
과거의 실수는 더 이상 지워야 할 오점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완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각이 됩니다.
물론, 그 실수가 좋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순간은 분명 아프고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아픈 조각조차도, 지금의 ‘나’라는 그림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한 부분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만약에’는 우리를 더 이상 과거에 묶어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현재의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후회스러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습관적인 자책 대신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세요.
‘이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걸까?’
‘이 아픔 덕분에 나는 어떤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후회의 늪에서 빠져나와, 의미의 땅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꺼내보세요
책상 서랍이나 앨범 속에 잠들어 있는 당신의 어린 시절 사진 한 장을 꺼내보세요.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모습,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흙투성이가 된 채 신나게 달리는 모습.
사진 속 아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그 눈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요?
아마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 작은 것에도 까르르 웃는 순수함, 그리고 약간의 불안함이 섞여 있을 겁니다.
이제 당신이 그토록 후회하는 과거의 당신이, 바로 이 아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서툴게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쳤던 20대의 당신도,
잘못된 판단으로 일을 그르쳤던 30대의 당신도,
그 본질은 사진 속의 이 아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여전히 모든 것이 처음이고, 두렵고, 서툰 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넘어진 겁니다.
그 아이가 실수한 겁니다.
당신은 사진 속의 이 아이에게 차마 이렇게 말하지는 못할 겁니다.
‘넌 왜 그렇게 멍청하니?’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해?’
대신, 이렇게 말해주겠죠.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처음이라서 그래.’
‘많이 아팠지? 이리 와, 내가 안아줄게.’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나면 돼.’
과거의 당신에게도 똑같이 대해주세요.
그를 나와 분리된, 한심한 존재로 보지 마세요.
그는 바로 당신의 보살핌과 위로가 필요한, 당신 안의 ‘어린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너무 오랫동안 당신의 비난 속에서 홀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다가가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아줄 차례입니다.
후회스러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이 사진 속 아이를 떠올리세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따뜻한 말을, 과거의 당신에게 똑같이 들려주세요.
‘괜찮아. 넌 최선을 다했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때 정말 힘들었겠다. 내가 알아줄게.’
당신의 다정한 목소리가, 과거에 갇혀있던 당신의 마음을 현재로 데려와 줄 유일한 열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약속을 잘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친구와의 약속, 회사와의 약속, 가족과의 약속.
그 약속을 어기면 신뢰를 잃을까 봐 걱정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과의 약속은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특히, ‘스스로를 아껴주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당신은 아마 수없이 다짐했을 겁니다.
‘이제 그만 자책해야지.’
‘과거는 과거일 뿐, 연연하지 말자.’
하지만 후회스러운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그 다짐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다시, 익숙한 자기 비난의 길로 들어섭니다.
괜찮습니다.
수백 번 약속을 어겼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오늘 다시 한번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당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
그의 편에 서서, 그의 최고의 변호인이 되어주겠다는 약속.
그가 어떤 모습이었든, 그의 존재 자체를 존중해주겠다는 약속.
이 약속은 거창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 번, 아니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과거의 내가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질 때,
‘한심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
그 말을 삼키고 대신 이렇게 속삭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애썼다.’
‘그때의 너도, 지금의 나도, 모두 소중한 나다.’
이 작은 속삭임이 쌓이고 쌓여, 당신의 마음을 바꿀 겁니다.
자기 비난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자기 이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겁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가장 다정한 보호자가 되어줄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그 약속을 다시 한번 시작해보세요.
과거의 당신은, 오늘의 당신이 그 약속을 지켜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깨진 찻잔을 버리는 대신, 금으로 이어 붙여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으로 만드는 기법이 있습니다.
금으로 상처를 잇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기법의 아름다움은 완벽함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깨졌던 ‘틈’, 그 상처의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금으로 채워 더욱 빛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깨지기 전보다, 깨지고 난 후가 더 깊은 이야기를 담은 아름다운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과거는 깨진 찻잔의 틈과 같습니다.
그것을 자꾸만 감추려 하고,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면, 그 틈은 영원히 어둡고 아픈 상처로만 남습니다.
하지만 그 틈을, 그 상처를, ‘괜찮아, 그럴 수 있었어’ 라는 따뜻한 이해와 ‘그 경험 덕분에 내가 성장했어’ 라는 긍정의 금가루로 채워 넣을 때, 당신의 삶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깊고 아름다운 작품이 되어갈 겁니다.
당신의 틈은 흠이 아닙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금빛으로 빛날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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