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는 쉬운 위로가 나에게는 왜 어려울까

친구가 울면서 전화를 합니다. 한참을 들어주고,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여 줍니다.

엉망이 된 마음을 하나하나 펴주고,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듯 온기를 전합니다. 전화를 끊은 친구는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합니다. 뿌듯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날 밤, 문득 혼자가 된 방 안에서 비슷한 문제로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낮에 친구에게 그토록 쉽게 건넸던 다정한 말들이 나에게는 도무지 나오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정신 차려야지’, ‘다들 이렇게 살아’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만 머릿속을 맴돕니다.

남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위로자인 당신이, 왜 정작 가장 위로가 필요한 나에게는 이토록 차갑고 인색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걸까요?

어째서 남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은 그렇게 따뜻하면서, 내 눈물을 닦아줄 때는 이토록 주저하게 되는 걸까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나에게, 그토록 다정한 위로 한마디를 건네는 일이 왜 이렇게 서툴고 어려운 걸까요. 그 마음속을 아주 천천히, 함께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내 마음인데도 내가 가장 모르는 이유

우리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볼 때, 마치 산 정상에 올라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길이 막혔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집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한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명쾌한 조언과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하지만 내 문제는 다릅니다.

그것은 마치 산 정상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안개 자욱한 좁은 골목길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벽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거대한 감정의 안개가 나를 온통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위로할 때 우리에게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볼 수 있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그 거리가 없습니다. 감정의 폭풍우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인데도 내가 가장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타인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한 재판관

마음속에 저울을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친구나 가족이 실수를 하면, 우리는 그 저울 위에 그들의 좋은 점, 어쩔 수 없었던 상황, 그동안의 노력을 함께 올려놓습니다. 그래서 저울은 쉽게 균형을 맞추고, 우리는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실수를 했을 때, 이 저울은 마치 고장이 난 것처럼 행동합니다.

저울 위에는 오직 나의 실수와 단점, 부족함만이 무겁게 올라갑니다. 나의 노력이나 좋은 점, 힘들었던 상황 같은 것들은 올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저울은 한쪽으로 속절없이 기울어지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역시 난 안돼’라는 냉혹한 판결을 내립니다.

우리 안에는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변호사가, 그리고 나에게는 아주 작은 잘못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재판관이 함께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재판관은 사실 나를 지키고 싶어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런 역할을 자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이 너무나 가혹해서, 우리를 더 외롭고 힘들게 만들 뿐입니다.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 있다면

친구가 거친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변의 안전한 곳에서 그 친구를 봅니다.

그래서 “저쪽으로 헤엄쳐!”, “숨을 쉬어!”라고 소리칠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위험한지 상대적으로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힘들다는 것은, 내가 바로 그 파도에 휩쓸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방에서 물이 덮쳐오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조차 헷갈립니다. 숨쉬기조차 벅찬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고 저쪽으로 헤엄쳐야 해’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남을 위로하는 것은 안전한 육지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일과 비슷합니다. 반면, 나를 위로하는 것은 거친 파도 속에서 나 스스로에게 방향을 알려주어야 하는 일과 같습니다.

당연히 후자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지금 당신이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는 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감정의 파도 한가운데서 너무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이겨내야지’라는 가혹한 주문

어릴 때부터 우리는 ‘강해야 한다’, ‘울면 안 된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진다’는 이야기를 알게 모르게 들어왔습니다.

넘어져도 씩씩하게 일어나야 착한 아이가 되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아야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이 정도는 스스로 이겨내야 해’라는 강력한 주문이 되어 우리 마음을 옭아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올 때, 우리는 그 신호를 따뜻하게 보듬어주기보다 ‘이겨내지 못하는 나’를 채찍질하게 됩니다.

남에게는 “힘들면 쉬어도 돼”라고 쉽게 말하면서, 정작 나에게는 그 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남의 약함은 보듬어주어야 할 상처로 보지만, 나의 약함은 극복해야 할 실패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 가혹한 주문을 스스로 깨닫고, ‘이제 그만 멈추겠다’고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위로의 첫걸음은 시작됩니다.

나의 약한 모습을 마주할 용기

나를 위로한다는 것은, 곧 나의 약하고 초라한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입니다.

‘나 지금 정말 지쳤구나’, ‘나 상처받았구나’, ‘나 외롭구나’ 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약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한번 약한 나를 인정하고 나면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대로 주저앉아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 감정을 외면하고, 괜찮은 척 단단한 갑옷을 입어버립니다.

하지만 상처는 덮어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곪아 더 큰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나를 위로하는 것은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나 지금 아파’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치료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거울 속의 나에게 말을 거는 연습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일 중 하나는 아마 거울을 보고 나 자신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일 겁니다.

처음에는 손발이 오그라들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평생을 함께해야 할 나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해준 적이 거의 없습니다.

비난과 채찍질은 익숙하지만, 칭찬과 위로는 너무나 낯섭니다.

오늘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볼 때, 딱 한마디만 건네보는 연습을 시작해 보세요. 대단한 말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오늘 하루도 애썼다”, “피곤해 보이네, 좀 쉬어”, “그래도 잘 버텨줘서 고마워” 같은 아주 사소한 말이면 충분합니다.

처음의 어색함만 넘어서면, 거울 속의 내가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서툰 위로의 시작

남을 위로할 때는 능숙한 전문가처럼 멋진 말을 건네고 싶지만, 나를 위로할 때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서툴고, 어설픈 위로라도 괜찮습니다.

아이가 처음 숟가락질을 배울 때를 떠올려 보세요. 아이는 밥을 반 이상 흘리며 서툴게 숟가락을 사용합니다. 그때 우리는 “왜 그것도 제대로 못 해!”라고 화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괜찮아, 흘릴 수도 있지. 다시 해보자”라며 다정하게 격려합니다.

나를 위로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막 ‘나를 위로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서툰 것이 당연합니다.

위로의 말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으면, 그냥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토닥여주기만 해도 좋습니다. 완벽한 위로가 아니라, 위로를 ‘시도했다’는 그 마음 자체가 중요합니다.

내 마음을 담아둘 작은 상자 하나

머릿속이 온갖 걱정과 불안으로 시끄러울 때는, 그 소리를 억지로 잠재우려 애쓰기보다 조용히 종이에 옮겨 적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줄 글이 아니니 잘 쓰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내 마음속 소음들을 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쏟아내는 겁니다.

“나는 지금 너무 불안하다. 왜냐하면…”, “화가 난다. 그때 그 사람이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냥 다 그만두고 싶다.”

이렇게 감정을 글로 적는 행위는, 마치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감정의 파편들을 꺼내어 작은 상자 안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리된 감정들은 더 이상 나를 통째로 흔들지 못합니다. 내가 감정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정을 ‘바라보는’ 주체가 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내 마음을 담아둘 작은 상자, 나만의 노트를 하나 마련해 보세요.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당신의 마음 대피소가 되어줄 겁니다.

괜찮아,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할 때

우리는 종종 위로에 뭔가 대단한 해결책이나 명쾌한 조언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내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위로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환한 대낮의 태양이 아니라, 발밑을 비춰주는 작은 손전등 불빛 하나입니다.

“괜찮아”라는 말은 바로 그 손전등 불빛과 같습니다.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너는 혼자가 아니야’, ‘이 감정은 틀리지 않았어’라고 말해주며 바로 다음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해줍니다.

친구가 울 때 우리가 “울지 마, 해결책을 찾아보자”라고 말하기보다 “괜찮아, 울어도 돼”라고 먼저 말해주는 것처럼, 나 자신에게도 그 말을 먼저 허락해 주세요.

해결책은 그 다음에 찾아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은, 어쩌면 그저 “괜찮아” 한마디일지 모릅니다.

나를 위한 위로는 근육과 같아서

한 번도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무거운 역기를 들 수 없는 것처럼, 나를 위로하는 마음도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습니다.

타인을 위로하는 근육은 평생에 걸쳐 사용해왔기 때문에 아주 튼튼하지만, 나를 위로하는 근육은 거의 사용한 적이 없어 약해져 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성격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오랫동안 쓰지 않아 약해진 근육을 다시 단련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가벼운 아령을 드는 것처럼, ‘애썼다’는 작은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어색하고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나를 위로하는 마음의 근육은 분명 조금씩 단단해질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주 무거운 슬픔이 찾아왔을 때도, 그 슬픔을 거뜬히 들어 올리고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제 막,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을 시작했을 뿐이니까요.

어쩌면 나를 위로하는 일은, 낯선 식물을 키우는 일과 닮아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식물이 어떤 환경에서 잘 자라는지, 물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햇빛은 얼마나 필요한지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때로는 실수도 하면서 조금씩 알아가야 합니다.

이때 자신을 탓하고 채찍질하는 것은, 왜 빨리 꽃을 피우지 않느냐고 식물의 잎을 억지로 잡아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식물에게 필요한 것은 윽박지름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며 매일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는 꾸준한 보살핌입니다.

오늘 밤, 하루의 소란을 무사히 견뎌낸 당신의 마음에 작은 화분에 물을 주듯,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살아내느라 오늘도 정말 고생 많았어’ 하고 말입니다. 그 따뜻한 한마디가, 당신의 마음속에 작은 꽃을 피워낼 가장 좋은 거름이 되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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