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자유

밤이 깊어가는 9월의 공기는 제법 서늘합니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 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 보면, 어김없이 그 생각들이 찾아옵니다. 오늘 낮에 동료에게 무심코 뱉었던 말 한마디, 어색하게 웃으며 넘겼던 순간, 이미 한참이나 지나버린 과거의 부끄러운 기억 같은 것들 말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이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온통 집어삼킬 듯이 위협합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이런 생각들은 한 번 시작되면 좀처럼 멈추질 않습니다. 머리로는 별일 아니라고, 그만 생각해도 괜찮다고 수없이 되뇌어 보지만, 마음은 제멋대로 더 깊은 불안의 바닷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 마치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버린 것만 같습니다.

출근길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도,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즐거운 순간에도, 문득문득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집니다. ‘너는 부족해.’, ‘넌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결국 또 실패할 거야.’ 이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해서, 마치 원래부터 나의 일부였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목소리가 하는 말을 의심조차 하지 못하고, 그것이 곧 ‘사실’이라고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의 하루를, 우리의 삶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혹시 지금 당신의 이야기는 아닌가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목소리

우리 머릿속에는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 목소리는 주로 나를 비판하고, 걱정하고, 다그치는 역할을 맡습니다. 마치 내 안의 엄격한 판사처럼, 사사건건 유죄를 선고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속삭이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또 늦겠다. 넌 정말 게을러.’

옷을 고르면서는 ‘그 옷은 너한테 안 어울려, 살쪄 보여. 사람들이 비웃을 거야.’라고 한마디 툭 던집니다.

회사에 출근해서는 어제 끝내지 못한 일을 떠올리게 하며 불안감을 증폭시킵니다. ‘그 일 때문에 오늘 분명히 깨질 거야. 넌 왜 미리미리 하질 못하니?’

상사의 무심한 표정 하나에 ‘내가 뭘 잘못했나? 아까 보고서 내용이 마음에 안 드셨나?’라는 의심의 씨앗을 심어놓습니다.

가만히 있다가도 불쑥, 몇 년 전의 창피했던 기억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입니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게 만듭니다.

밤이 되면 이 목소리는 더욱 커져서, 오늘의 사소한 실수들을 하나하나 되짚어주며 잠 못 들게 만듭니다. ‘오늘 회의 때 너무 말을 못 했어. 다들 나를 한심하게 봤을 거야.’

이 목소리는 너무나 집요하고 설득력이 있어서, 우리는 그 말을 진짜 ‘나의 생각’이라고 믿습니다.

마치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진실의 소리인 것처럼요. 오랜 시간 함께해왔기에 분리해서 생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목소리가 나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정말로 내가 부족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위축되고, 새로운 도전을 피하게 됩니다.

그 목소리가 ‘넌 사랑받을 수 없어’라고 말하면, 정말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대하게 됩니다. 누군가 다가와도 밀어내고,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상대방의 애정을 시험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우리는 이 목소리와 싸워보려고 애씁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쳐 보기도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소중하다’와 같은 긍정적인 생각을 억지로 주입하며 목소리를 덮어보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그 목소리는 더 끈질기게 우리에게 달라붙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는 걸 보니, 역시 넌 약하구나’라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마치 그림자처럼, 떨쳐내려 발버둥 칠수록 더욱 선명해질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 목소리와 함께 살게 된 걸까요.

왜 이 목소리는 나에게 단 한 번도 따뜻한 말을 건네주지 않는 걸까요.

이 목소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어릴 적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들었던 비판적인 말일 수도 있고, 과거의 실패 경험이 만들어낸 상처의 메아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이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비난하는 대로 움츠러들고 괴로워하며 살아야만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목소리는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요.

그 목소리가 하는 말이 세상의 유일한 진실이나 팩트가 아니라는 것을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지, 아니면 그저 흘려보낼지를 선택할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요. 그 힘을 깨닫는 것이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만약에’라는 늪에 빠져버릴 때

‘만약에’라는 단어만큼 우리를 순식간에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말도 없을 겁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어쩌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수많은 가능성.

우리 마음은 유독 이 ‘만약에’라는 상상 놀이를 좋아합니다. 특히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죠.

‘만약 내가 내일 발표를 망치면 어쩌지?’

‘만약 그 사람이 나를 떠나가면 어쩌지?’

‘만약 내가 큰 병에 걸리면 어쩌지?’

‘만약 우리 아이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지?’

이런 생각의 꼬리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하나의 걱정이 또 다른 걱정을 낳고, 그 걱정은 더 큰 재앙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향해서만 맹렬히 달려가죠.

마음속에서는 이미 온갖 끔찍한 영화가 몇 편씩 상영되고 있습니다.

발표하다가 목소리가 떨리고, 준비한 내용을 전부 잊어버리고, 사람들이 비웃고, 결국 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숙이는 내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차갑게 변해버린 눈빛으로 이별을 고하는 장면, 그 후 혼자 남아 절망하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의사 선생님의 심각한 표정과 믿을 수 없는 진단 결과, 앞으로 남은 내 삶과 가족들의 슬픔을 상상하며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손에 땀이 나고, 숨이 가빠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합니다.

분명 지금 여기, 2025년 9월의 어느 날, 나는 안전한 내 방 안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재앙 속에 가 있습니다. 현재의 평온함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 가진 무서운 힘입니다.

생각은 아직 현실이 아닌 것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뇌는 실제 위협과 상상 속 위협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똑같은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킵니다.

상상 속의 고통을 실제 고통처럼 생생하게 체험하게 합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현재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버립니다.

우리는 ‘만약에’라는 늪에 발이 묶인 채, 있지도 않은 위험을 피하려 허우적거립니다.

그러는 동안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소중한 순간들을 모두 놓쳐버립니다.

따뜻한 차의 향기,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 곁에 있는 사람의 미소, 귓가를 스치는 감미로운 음악 같은 것들.

불안이라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위협적으로 보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평범한 표정조차 나를 향한 비난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가만히 한번 돌아봅시다.

과거에 그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만약에’들이 실제로 얼마나 일어났나요?

물론 힘든 일도 있었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걱정은 그저 걱정으로 끝났을 겁니다. 발표는 생각보다 잘 끝났고, 그 사람은 여전히 내 곁에 있으며, 건강 검진 결과는 정상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생존을 위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원시 시대에 작은 소리에도 ‘혹시 맹수가 아닐까?’라고 걱정했던 조상들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는 그 기능이 너무 과하게 작동하여, 우리를 불필요한 고통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대 사회의 수많은 ‘만약에’는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말입니다.

내 생각이 정말 ‘나’일까요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생각’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나는 미래가 불안하다고 생각해.’

이 말속에는 아주 강력한 전제가 숨어있습니다. 바로 ‘생각 = 나’라는 공식입니다. 마치 ‘나는 키가 크다’ 또는 ‘나는 한국인이다’처럼, 생각을 나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고유한 특성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 이것이 모든 마음의 고통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당신의 머릿속에 갑자기 ‘분홍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마!’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분홍색 코끼리’는 아니잖아요. 그저 우스꽝스러운 생각 하나가 지나갔을 뿐입니다.

‘오늘 저녁은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당신이라는 존재가 ‘떡볶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사소한 생각들은 나와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저 머릿속을 잠시 방문했다가 사라지는 손님처럼 대하죠. ‘아, 떡볶이 생각이 나네’ 하고 가볍게 알아차릴 뿐입니다.

하지만 유독 ‘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앞에서는 이 분리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립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우리는 그 생각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 쓸모없다는 생각이 드네’라고 관찰하는 대신, ‘그래, 나는 쓸모없어’라고 즉시 동의해버립니다.

마치 재판관이 내리는 최종 판결처럼, 신이 내리는 계시처럼 절대적인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맞춰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처럼 대하고, 중요한 기회를 포기하고,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립니다. 생각의 예언이 스스로 실현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이 만들어낸 감정에 흠뻑 젖어버립니다.

슬픔, 외로움,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이 생각이 정말 ‘사실’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저 이 끔찍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나’라는 존재 자체로 착각합니다. 생각은 정신적인 사건(mental event)일 뿐, 객관적인 현실(objective reality)이 아닌데도 말이죠.

하지만 한번 조용히 스스로에게 물어봐 주세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요?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가요?

분명 같은 ‘나’이지만, 생각과 감정, 가치관, 심지어 몸의 세포까지 수없이 변해왔습니다.

어제는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슬펐다가도, 오늘은 친구의 농담 한마디에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생각은 날씨처럼 끊임없이 변합니다. 맑았다가 흐렸다가,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어떤 생각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고, 어떤 생각은 안개처럼 오래 머뭅니다.

당신은 그 변화무쌍한 날씨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 모든 날씨를 묵묵히 품어내는 거대한 하늘과 같습니다.

생각은 당신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당신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생각은 당신이 가진 것(what you have)이지, 당신 자체(what you are)가 아닙니다.

이 작은 차이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에는 거대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생각의 감옥에 작은 창문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이야기를 만드는 공장

우리 마음을 거대한 ‘이야기 공장’이라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이 공장은 24시간, 365일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꿈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주된 생산품은 바로 ‘이야기’입니다. 온갖 종류의 이야기들이죠.

과거의 경험, 현재의 감정,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는 재료들을 마구잡이로 섞어서요. 이 공장은 논리나 사실 확인보다는 속도와 자극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직장 상사가 나를 보고 인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재료)이 공장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공장은 즉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마치 숙련된 작가처럼 순식간에 기승전결을 갖춘 스토리를 완성합니다.

‘상사가 나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어. 내가 어제 보고서에 오타를 낸 것 때문에 화가 났나 봐. 그 오타 하나 때문에 내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거야. 이러다가 나만 미워하고, 안 좋은 평가를 줘서 승진에서 누락되면 어떡하지? 결국 회사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단순한 ‘인사를 받지 않음’이라는 재료가 순식간에 ‘해고의 위기’라는 훌륭한 한 편의 비극 드라마로 완성됩니다. 사실 상사는 밤새 잠을 설쳐 피곤했거나,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인데도 말이죠.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한참 동안 답이 없다는 ‘사실’(재료)이 들어옵니다.

공장은 또 바쁘게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관계 드라마 전문 작가가 나섭니다.

‘내가 뭔가 실수했나?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기분이 상했나? 아, 그때 그 농담이 무례하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 이제 나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가 봐. 나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좋은 친구를 또 잃게 생겼구나.’

이번에는 관계의 파탄과 자기 비난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사실 친구는 회의 중이거나 휴대폰 배터리가 없었을 뿐인데도요.

이 공장의 특징은, 만들어진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자극적인 이야기, 감정을 강하게 일으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에, 공장은 주로 비극이나 공포 장르의 이야기를 선호합니다.

슬픔, 분노, 불안, 두려움 같은 감정은 이야기의 아주 좋은 양념이 됩니다.

우리는 이 공장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을 진짜 세상이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공장이 만들어낸 슬픈 영화를 보면서 함께 울고, 무서운 영화를 보면서 함께 두려워합니다.

내가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모든 감정을 그대로 흡수하고, 이야기의 결말대로 내 삶이 흘러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공장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곧이곧대로 빠져드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화관 스크린이 아니라, 영사기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요.

‘아, 우리 마음 공장이 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구나.’

‘이번에는 ‘나는 버림받을 거야’라는 제목의 슬픈 드라마를 상영하고 있네. 꽤나 익숙한 스토리인데?’

‘꽤나 자극적인 스토리인데? 하지만 이건 그냥 이야기일 뿐이지, 현실은 아니야. 상사가 인사를 안 한 것, 그게 전부야.’

이야기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공장은 계속 돌아갈 테니까요. 그게 마음의 본성이니까요.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단지 이야기일 뿐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에 휘둘리는 비련의 주인공이 아니라, 잠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루한 영화를 보다가 잠시 졸 수도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영화는 그냥 꺼버릴 수도 있는 그런 관객 말입니다.

하늘과 구름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처럼

생각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생각을 없애려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을 가만히,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마치 맑은 가을날,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듯이 말입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저 넓고 푸른 하늘입니다.

하늘은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을 품어내는 고요하고 광활한 공간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과 감정들은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입니다.

어떤 날은 솜사탕처럼 하얗고 예쁜 구름이 두둥실 떠다닙니다. 기분 좋은 생각, 행복한 감정들이죠. ‘오늘 날씨 좋다’, ‘사랑받는 기분이야’ 같은 생각들입니다.

어떤 날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불안하고, 슬프고, 화나는 생각들입니다. ‘나는 실패자야’, ‘아무도 나를 이해 못 해’ 같은 생각들이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구름들이 정신없이 빠르게 흘러가기도 합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날입니다.

어떤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텅 빈 하늘만 펼쳐지기도 합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을 ‘구름’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먹구름이 끼면, ‘내 인생은 끝났어. 온통 어둠뿐이야.’라며 절망했습니다. 하늘 전체가 먹구름인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먹구름을 억지로 쫓아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손을 뻗어 구름을 흩어버리려고 했고, 바람을 불어 날려 보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구름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더 지칠 뿐입니다. 먹구름과 싸우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려 정작 중요한 일을 할 힘이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도 그 뒤에는 언제나 푸른 하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구름은 잠시 하늘을 가릴 수는 있지만, 하늘 그 자체를 망가뜨리거나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본질은 구름 때문에 변하지 않습니다.

구름은 그저 왔다가, 머물다가, 이내 바람을 타고 흘러갈 뿐입니다. 그것이 구름의 본성입니다. 영원히 머무는 구름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강렬한 불안과 슬픔이 나를 뒤덮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은 잠시 머물다 가는 구름일 뿐입니다.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 생각과 감정이 ‘나’는 아닙니다. 나는 그 감정을 경험하는 하늘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구름과 싸우는 것을 멈추고, 그저 하늘이 되어 구름을 바라봐 주면 됩니다.

‘아, 지금 내 마음 하늘에는 ‘불안’이라는 이름의 먹구름이 지나가고 있구나.’

‘저쪽에는 ‘후회’라는 잿빛 구름도 떠 있네. 꽤 오랫동안 머물고 있구나.’

‘구름의 모양이나 색깔을 내가 바꿀 수는 없지. 그냥 저렇게 흘러가도록 지켜보자.’

구름을 판단하거나(‘왜 또 이런 구름이 낀 거야!’), 바꾸려 하거나(‘저 구름을 없애야 해!’), 없애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각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강력하고도 평화로운 방법입니다.

생각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시간

생각이 사실이 아님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막상 부정적인 생각의 파도가 밀려오면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기 쉽습니다. ‘하늘과 구름’ 비유를 떠올릴 겨를도 없이 생각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이럴 때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생각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박물관의 유물에 이름표를 붙여 분류하듯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도 객관적인 이름표를 달아주는 것이죠. 이 과정을 ‘생각 알아차리기’ 또는 ‘인지적 탈융합’이라고도 부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정말 한심해. 또 일을 망쳤어.’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 생각에 푹 빠져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대신, 잠시 멈춰서 이렇게 이름표를 붙여보는 겁니다.

‘아, ‘나를 비난하는 생각’이 떠올랐구나.’

혹은 더 간단하게, ‘비난 생각’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습니다. 핵심은 ‘나는 한심하다’라는 내용을 ‘~라는 생각’이라는 껍데기로 감싸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미래에 끔찍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너무 불안해.’라는 생각이 엄습하면,

‘아, ‘미래를 걱정하는 생각’이 왔네.’ 또는 ‘걱정 생각’이라고 이름표를 달아줍니다. 때로는 ‘마음이 재앙 시나리오를 쓰고 있구나’라고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면,

‘이건 ‘마음대로 추측하는 생각’이구나.’ 또는 ‘독심술 생각’이라고 재치 있게 이름 붙여볼 수도 있습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해.’라는 생각이 맴돌면,

‘아, ‘과거를 후회하는 생각’이구나.’ 또는 ‘과거 곱씹기’라고 이름표를 붙입니다.

어떤가요? 그저 이름표 하나를 붙여주었을 뿐인데, 생각과 나 사이에 미세한 거리가 생기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생각을 ‘나’와 동일시할 때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라는 생각’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그것은 내 마음을 관찰하는 ‘대상’이 됩니다.

나는 생각을 하는 주체이고, 그 생각은 내 마음이라는 무대에 잠시 나타난 배우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배우가 슬픈 연기를 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슬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생각을 억누르거나 무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알아차려 주는 행위입니다. 그 생각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네가 와 있구나”라고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아, ‘걱정’이라는 손님이 오셨군요. 잠시 머물다 가세요.”라고 인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손님을 내쫓으려 실랑이를 벌일 필요도 없고, 손님이 우리 집의 주인 행세를 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손님은 손님일 뿐임을, 언젠가는 떠나갈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 전략의 장점은 매우 간단해서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름표를 붙이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아, 또 걱정 생각이네. 난 왜 이 모양이지?’라며 이름표를 붙이는 자신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판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이름표를 붙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잠시 멈춰서 알아차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 작은 멈춤의 순간이, 우리를 생각의 감옥에서 해방시켜주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파도가 밀려올 때, 잠시 멈춰 서기

강력한 생각은 종종 거센 감정의 파도를 동반합니다.

분노, 슬픔, 두려움, 질투 같은 감정들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한순간에 우리를 덮쳐 버립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온몸과 마음을 장악해 버리죠.

파도에 휩쓸린 우리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뇌의 이성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멈추고, 감정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편도체가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시키는 대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되죠.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우리는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상대방에게 평생 후회할 상처 주는 말을 내뱉습니다.

슬픔에 압도될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의욕을 잃고 무기력하게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며칠이고 나오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올 때,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중요한 발표나 면접을 회피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그리고 파도가 지나가고 나면, 언제나 후회가 남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우리는 파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방법은 있습니다. 바로 파도타기 선수처럼 파도의 힘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잠시 멈춰 서서 내 몸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비판적인 말에 분노라는 붉고 뜨거운 파도가 밀려옵니다.

그 순간 즉시 쏘아붙이거나 반박하는 대신, 딱 10초만 멈춰보세요.

그리고 내 몸을 느껴보는 겁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구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기분이야. 얼굴이 뜨거워지네. 어깨와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구나.’ 이렇게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감정과 약간의 거리가 생깁니다.

내 마음속 생각도 관찰합니다. ‘감히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네. 억울하다는 감정이 올라오는구나.’

슬픔이라는 차갑고 무거운 파도가 밀려옵니다. 실망스러운 소식을 들었을 때입니다.

무기력에 빠져들기 전에 잠시 멈춰서 내 몸과 마음을 느껴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돌덩이가 앉은 것처럼 무겁구나. 눈물이 날 것 같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렇게 감정의 파도가 밀려올 때, 그것을 이름 붙이고(‘아, 분노가 왔구나’), 몸의 감각을 느껴주고, 관련된 생각을 알아차려 주는 것.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파도와 하나가 되어 휩쓸리는 대신, 파도를 지켜보는 관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전략은 감정을 억누르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감정을 회피하거나 억누르면, 그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몸 안에 쌓여 언젠가 더 크게 폭발합니다. 이 방법은 감정을 충분히 느끼되, 그 감정에 따라 즉각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감정과 반응 사이에 작은 공간을 만드는 훈련입니다.

파도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부서져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거센 파도라도 해변에 부딪히면 힘을 잃고 잔잔한 물거품으로 변합니다.

우리가 잠시 멈춰서 지켜봐 주는 시간 동안, 감정의 파도는 스스로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서서히 잦아들 것입니다. 그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감정의 파도와 나 사이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의 공간이 넓어지는 순간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그저 바라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꽉 막혀 있던 하수구가 뻥 뚫린 것처럼, 혹은 먼지로 가득했던 창문을 깨끗이 닦아낸 것처럼, 답답했던 마음에 시원한 공간이 생겨납니다.

예전에는 부정적인 생각 하나가 떠오르면 온 세상이 그것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부족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내 존재의 모든 면이 부족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내가 가진 장점이나 성공했던 경험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죠. 생각이 곧 나였고, 나는 그 생각이라는 좁은 상자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나는 상자가 아니라, 상자를 담고 있는 훨씬 더 넓은 방이라는 것을요. 방 안에는 다른 가구들도 많고, 창문으로 햇살도 들어온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부족해’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하루 종일 우울하고 위축되었을 겁니다. 사람들을 피하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려 했겠죠.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을 마음 한쪽에 놓아둘 수 있습니다.

‘아, ‘나는 부족해’라는 생각이 저기 있구나. 늘 찾아오던 그 친구네. 잠시 머물다 가도록 자리를 내어주자.’

그 생각이 마음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동시에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배경에 라디오 소음이 들리지만, 나는 여전히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처럼요.

창밖의 나무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릴 수도 있고, 친구와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안고서도 말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져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채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삶의 다른 소중한 것들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중요한 시험을 치를 수 있고, 슬픔을 느끼면서도 친구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공간이 넓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마치 집이 넓어져서, 마음에 들지 않는 가구 하나가 있다고 해서 집 전체가 엉망이 되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가구는 그냥 그 자리에 놓아두고, 다른 예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면 되는 것이죠. 가구를 버리려고 애쓰다가 집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의 공간이 넓어지면, 우리는 더 이상 생각과 감정의 노예로 살지 않게 됩니다.

화가 날 수는 있지만, 화에 지배당하지는 않습니다. ‘화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절하게 말하는 것을 선택하겠어.’

슬픔을 느낄 수는 있지만, 슬픔에 잠식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픔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오늘 하루 나를 위해 산책을 하겠어.’

불안할 수는 있지만, 불안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는 않습니다. ‘불안감을 내 옆자리에 태우고,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운전대를 잡겠어.’

우리는 생각과 감정을 소중한 손님처럼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왔을 때는 알아차려주고, 머무는 동안에는 친절하게 공간을 내어주고, 떠나갈 때는 미련 없이 보내줍니다.

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의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 헤매던 안식처가 아닐까요.

나를 괴롭히던 완벽주의와 이별하기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생각들 중에는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아주 까다로운 손님이 있습니다.

이 손님은 겉보기에는 매우 합리적이고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를 발전시키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처럼 속삭입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더 완벽해야 해.’

‘사람들에게 흠잡히지 않으려면 빈틈을 보여서는 안 돼.’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 실수는 곧 실패야.’

완벽주의라는 생각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성취를 가져다주기도 하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실수하면 버림받을 거야’, ‘완벽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라는 깊은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려움 때문에 늘 긴장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살아갑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계속 자신을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자책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전긍긍합니다. 칭찬 9개를 들어도 비판 1개에 온 마음을 빼앗깁니다.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오직 완벽한 결과만을 향해 달려가다가 쉽게 지쳐 나가떨어집니다. 시작하기 전에 완벽한 계획을 세우려다 아예 시작조차 못 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생각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보세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수많은 생각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세상의 절대적인 법칙이나 진리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 마음 공장이 만들어낸,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야기일 뿐이죠. 어쩌면 어릴 적부터 주입받은 사회적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완벽주의의 감옥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완벽주의 생각은 ‘단 하나의 오타도, 논리적 허점도 없는 완벽한 보고서를 써야 해’라고 속삭입니다. 이 생각에 사로잡히면 첫 문장을 쓰는 것조차 두려워집니다. 몇 시간을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스트레스만 받습니다.

이때, ‘아, 완벽주의 생각이 또 왔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이별을 고하고, ‘완벽함’ 대신 ‘충분히 좋음(Good enough)’을 선택합니다. ‘일단 초안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 나중에 수정하면 돼.’ 이 작은 생각의 전환이 우리를 마비 상태에서 행동으로 이끌어 줍니다.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실수는 실패가 아니라,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입니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작은 흠과 부족함이 우리를 더 인간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제 ‘완벽해야 한다’는 낡은 생각 대신, 새로운 생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할 뿐, 결과는 내 손을 떠난 것이다.’

‘나는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며, 실수를 통해 배운다.’

‘나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충분히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물론 완벽주의라는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올 겁니다. 수십 년간 함께해 온 친구니까요. 그럴 때마다 그 생각을 알아차리고 이름표를 붙여주세요. ‘아, 또 완벽주의 생각이 왔구나.’

그리고 그 생각과 싸우는 대신, 그냥 그 자리에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완벽주의 생각이 마음에 떠오른 채로, 조금은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용기 있게 첫발을 내디뎌 보세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우리를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기

돌이켜보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나 가혹한 주인이었습니다.

머릿속의 비난하는 목소리를 ‘나’라고 착각하고, 그 목소리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으며 자신을 미워하고 탓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심한 말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스스로에게 퍼부었습니다.

‘넌 정말 멍청해.’, ‘그럴 줄 알았어, 넌 안 돼.’,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

만약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힘들어할 때, 당신이 이런 말들을 그 친구에게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그 친구와는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가기 어려울 겁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기 자신에게는 이토록 잔인한 걸까요. 자신을 채찍질해야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연구 결과는 그 반대를 보여줍니다. 자기 비난은 동기 부여가 아니라 우울감과 무기력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이제 그동안의 습관을 멈추고,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나 자신이 되어주기로 결심해 보면 어떨까요.

가장 친한 친구는 내가 잘 나갈 때만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실수하고 넘어져서 엉망진창이 되었을 때, “거봐, 네가 그럴 줄 알았어”라고 비난하는 대신, 말없이 다가와 등을 토닥여주는 사람입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어떻게 매번 잘하기만 하겠어. 얼마나 속상했어.’라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나의 부족한 점을 비난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바로 이 ‘자기 자신과 친구 되기’, 즉 자기 자비(Self-compassion)의 시작점입니다.

머릿속에서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는 이제 그 목소리를 따라 함께 나를 공격하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 때문에 아파하고 있을 내 마음을 알아주고, 다정한 친구가 되어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연습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요한 시험에 떨어졌을 때 ‘역시 난 안 돼, 난 루저야’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잠시 멈추고, 가장 친한 친구가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친구에게 뭐라고 말해주시겠어요?

아마도 ‘시험 하나로 네 가치가 결정되는 게 아니야. 넌 충분히 노력했어. 이번에는 운이 없었을 뿐이야. 맛있는 거 먹고 기운 내자.’라고 말해줄 겁니다. 바로 그 말을, 그대로 나 자신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 ‘너는 루저다’는 생각이 또 너를 괴롭히고 있구나. 그 생각 때문에 마음이 많이 힘들겠구나.’

‘괜찮아. 그건 그냥 생각일 뿐이야. 네가 정말 루저여서가 아니야.’

‘나는 네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아. 결과가 어떻든, 그 과정 자체로도 대단한 거야. 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이렇게 스스로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는 연습을 시작해 보세요. 손을 가슴에 얹고 말하면 더욱 효과적입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손발이 오그라들 수도 있습니다. 수십 년간 자기 비난만 해왔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반복하다 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내면의 비판자와 싸우는 대신, 내면의 다정한 친구와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 친구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자기 자신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결코 떠날 수 없는 유일한 동반자입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먼저 나의 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따뜻한 격려와 지지의 목소리가 그 자리를 채울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평생 찾아 헤맨 자유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머릿속 생각의 폭풍우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잠잠히 알아차리고 있는 고요한 중심.

그 중심이 바로 진짜 당신입니다.

생각이라는 지나가는 구름에 더 이상 자신을 내어주지 마세요. 감정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마세요.

당신은 그 모든 것을 품고도 넉넉한, 드넓은 하늘이니까요.

오늘 밤에는 부디, 그 하늘 아래서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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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나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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