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아도 머릿속은 대낮처럼 환합니다. 분명 몸은 이불 속에 있는데, 마음은 벌써 내일 아침 회의실에 가 있습니다. 다음 주 마감할 보고서를 붙들고 씨름하기도 하죠. 어서 자야 내일 일찍 일어나는데, 잠들어야 피곤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누군가 꺼지지 않는 확성기를 들고 외치는 것만 같습니다. ‘해야 할 일’ 목록을 끝없이 읊어대는 그 소리에 온몸이 긴장합니다.
일요일 저녁이면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주말 내내 제대로 쉬지도 못한 것 같은데 벌써 월요일이 코앞입니다. 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어요.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걸까. 남들은 이 시간에 더 발전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넷플릭스를 보면서도, 친구와 웃고 떠들면서도 머릿속 다른 한편에서는 계속해서 알람이 울립니다. 삐- 삐-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우리는 어느새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해치우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머릿속은 온통 ‘해야 할 일’이라는 네 글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 해내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 같고, 무가치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불안감에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합니다.
이 글은 바로 그 꺼지지 않는 알람 소리에 지쳐버린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잘 알지?’ 싶을지도 모릅니다. 괜찮아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니까요. 이제 그 시끄러운 알람 소리를 함께 조금씩 줄여보는 연습을 시작해 봐요.
꺼지지 않는 머릿속 경보음
가만히 있어도 마음속이 분주한 기분을 아시나요?
고요한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나 홀로 깨어있는 듯한 느낌 말이에요.
몸은 분명 멈춰 있는데, 생각은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선수처럼 헐떡이며 내달립니다.
해야 할 일, 해야 했던 일, 앞으로 해야만 하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걱정과 불안을 반복해서 재생하고 또 재생합니다.
이 경보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문득 울립니다. ‘이거 먹고 나면 운동해야 하는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웃고 떠들다가도 울립니다. ‘지금 이렇게 놀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좋아하는 영화에 푹 빠져 있다가도 어김없이 울립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이 소리는 우리의 모든 즐거운 순간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마음 편히 무언가에 온전히 집중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 등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며 빨리 뛰라고 소리치는 기분.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멈추지 못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도, 잠시의 고요함조차 견디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이 경보음 때문일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불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죠.
이 경보음의 가장 무서운 점은, 나를 위한 소리처럼 들린다는 겁니다.
‘너를 위해서야. 이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어. 뒤처지지 않을 수 있어.’
마치 나를 위하는 충고처럼, 다정하고 논리적인 목소리로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리를 거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경보음은 우리에게 힘을 주기보다, 우리의 힘을 몽땅 빼앗아 가 버립니다.
마음의 배터리를 남김없이 소모시켜, 정작 정말 힘을 내야 할 때 방전 상태로 만들어 버리죠.
온몸의 근육은 항상 긴장해 있고, 숨은 얕아지고, 소화도 잘되지 않는 느낌.
마음의 경보음이 몸의 경보등까지 켜버린 셈입니다.
결국 우리는 지쳐 쓰러집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경보음은 여전히 울리는데, 이제는 그 소리를 따라 움직일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거죠.
이것이 바로 머릿속 경보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슬픈 결과입니다.
누가 이 알람을 켜고 간 걸까요
이 지긋지긋한 알람, 대체 언제부터 울리기 시작했을까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머릿속에 이 알람이 설치되어 있었던 건 아닐 겁니다.
아주 어릴 적, 우리는 그냥 노는 게 일이었고, 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학생이니까 공부해야 해.’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해.’
‘나중을 위해 지금 노력해야 해.’
따뜻한 조언과 사랑의 말 속에,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씨앗처럼 심어졌습니다.
그 씨앗은 우리가 자라면서 함께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학교에서는 성적으로, 사회에서는 실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평가했습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완벽하게 해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죠.
옆 친구가 나보다 더 많은 문제를 풀 때, 동료가 나보다 먼저 승진할 때, 그 믿음은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SNS를 켜면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빼고 모두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외국어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멋진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들.
그들의 반짝이는 삶을 보다 보면,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나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 알람은 어쩌면 우리를 지키기 위해 켜졌을지도 모릅니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실패하지 않도록,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깨우기 위해서였을 거예요.
분명 시작은 우리를 위한 좋은 의도였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알람을 끄는 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언제 쉬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해야 괜찮은 건지, 그 기준을 배우지 못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알람이 울리는 대로, 멈추지 않고 달리기만 했던 겁니다.
결국 이 알람을 켠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우리 자신이 함께 켠 것일 수 있습니다.
나를 보호하려던 착한 마음이, 오히려 나를 지치게 만드는 소음이 되어버린 거죠.
이제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알람을 켠 것이 나 자신이기도 하다면, 끌 수 있는 사람도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요.
그 방법을 이제부터 천천히, 함께 찾아가 볼 겁니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켜줄 거라는 착각
우리는 왜 그토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리는 걸까요?
아마도 그 생각의 끈을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 같기 때문일 겁니다.
마치 끝없는 낭떠러지에서 가느다란 동아줄 하나에 매달려 있는 기분.
그 동아줄이 바로 ‘해야 한다’는 압박감인 셈이죠.
이 압박감이 있어야만 내가 최소한의 무언가를 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 긴장감마저 없으면, 나는 한없이 게을러지고 나태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정신 차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쉴 시간이 어디 있어.’
마치 내 안의 엄격한 감독관처럼,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합니다.
이런 생각이 나를 실패로부터, 비난으로부터, 무가치함으로부터 지켜줄 거라고 굳게 믿는 거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이 압박감이 정말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주고 있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일 때가 더 많지 않나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오히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던 경험.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첫걸음을 떼는 것조차 두려웠던 순간들.
결국 마감 직전까지 미루고 미루다, 허둥지둥 끝내고 자책했던 밤들.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건강한 연료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에너지를 갉아먹는 독성 물질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달리게 하는 게 아니라, 제자리에 주저앉게 만듭니다.
마치 자동차의 액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엔진은 터질 듯이 굉음을 내며 과열되지만, 자동차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죠.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소모되고 있었던 겁니다.
‘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지켜주는 방패가 아니라, 우리를 가두는 보이지 않는 감옥입니다.
그 감옥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죄인처럼 다루고, 벌을 줍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해요.
우리는 동아줄을 놓아도 추락하지 않습니다.
우리 발밑에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푹신하고 안전한 땅이 있습니다.
잠시 쉬어도 괜찮고, 조금 못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습니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오늘 하루, 알람 코드를 잠시 뽑아두어요
매일 아침, 우리는 수많은 ‘해야 할 일’의 목록과 함께 눈을 뜹니다.
마치 군인이 전투에 나가기 전 무기를 챙기듯, 우리는 마음속으로 오늘의 과업들을 점검하죠.
그 생각만으로도 아침 공기가 무겁게 느껴집니다.
오늘은 딱 하루만, 그 목록을 잠시 잊어보기로 해요.
머릿속 알람의 코드를 아주 잠시만 뽑아두는 겁니다.
알람이 완전히 고장 나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잠시 멈추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결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무엇이든 해도 괜찮다’고 나에게 허락해 주는 겁니다.
계획에 없던 일을 해도 괜찮고, 아무런 생산적인 결과가 없어도 괜찮다고요.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죠.
출근길에 늘 가던 길이 아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골목으로 걸어가 보기.
점심시간에 구내식당 대신, 문득 먹고 싶어진 떡볶이를 사 먹으러 가기.
퇴근 후에 운동을 가야 한다는 생각 대신, 그냥 공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 보기.
아주 사소한 행동들이지만,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연습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하고 싶은 마음’을 무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늘 효율과 결과, 의무와 책임이 우선이었죠.
하지만 우리 마음에도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영양분은 바로 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공급됩니다.
알람 코드를 뽑아두는 시간은, 텅 비어버린 마음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안할 수 있어요.
코드를 뽑았는데도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알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을 겁니다. ‘이렇게 시간 보내도 되나?’
그럴 땐 그냥 그 소리를 가만히 들어주세요. ‘아, 또 알람이 울리려고 하네. 그동안 참 열심히도 울렸구나.’
다그치거나 억누르지 않고, 그저 알아차려 주는 것만으로도 소리는 조금씩 잦아들 겁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이런 작은 자유를 선물해 보세요.
알람이 멈춘 아주 짧은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묻혀버린 진짜 마음의 소리
머릿속 알람 소리가 너무 크면,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특히 가장 작고 여린 소리, 바로 내 마음의 진짜 목소리는 쉽게 묻혀버리고 말죠.
‘해야 한다’는 의무감의 확성기 소리 사이에서, ‘하고 싶다’는 속삭임은 들릴 틈이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까요?
최근에 무언가를 정말 순수하게 ‘하고 싶어서’ 한 적이 언제였나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말입니다.
어릴 적, 아무 이유 없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놀이터 흙바닥에 주저앉아 놀았던 것처럼요.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마음의 소리에 귀를 닫고 살아왔으니까요.
‘그런 거 할 시간에 더 유용한 일을 해야지.’
‘그게 돈이 돼, 밥이 돼?’
내 안의 감독관은 마음의 소리가 고개를 들 때마다 가차 없이 핀잔을 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말해봤자 무시당할 걸 아니까, 원하는 게 있어도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죠.
‘넌 뭘 좋아하니?’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할 때 즐거운지, 나 자신도 잊어버린 겁니다.
알람 소리를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보세요.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을 거예요. 너무 오랫동안 침묵했으니까요.
하지만 괜찮아요. 조용히, 끈기 있게 기다려주세요.
마치 숨어있는 작은 동물이 경계를 풀고 굴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요.
그러다 보면 아주 작은 신호들이 느껴지기 시작할 겁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문득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
길을 걷다 우연히 맡게 된 빵 굽는 냄새에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
좋아하는 노래의 전주가 흘러나올 때 살짝 미소가 지어지는 찰나.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이 보내는 작은 신호, 작은 속삭임입니다. ‘나 이거 좋아해.’
이 작은 소리들을 놓치지 마세요.
그 소리들을 하나씩 발견하고, 소중하게 여겨주세요.
‘아, 나는 파란 하늘을 보는 걸 좋아하는구나.’
‘고소한 빵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이렇게 내 마음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겁니다.
‘해야 할 일’의 목록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마음속에 채워나가 보세요.
시끄러운 알람 소리 속에서 길을 잃었던 우리는, 이 작은 마음의 소리들을 따라갈 때 비로소 나에게 돌아오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당신은 아니에요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내가 오늘 해낸 일의 양이 곧 나의 가치라고.
‘해야 할 일’ 목록에 줄을 그을 때마다, 내 존재의 가치가 조금씩 올라가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계획했던 일을 다 끝내지 못한 날에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죠.
마치 성적표의 숫자가 나라는 사람 전체를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성과’와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쉬지 못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0점짜리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가만히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이유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지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당신은 그에게 ‘넌 정말 쓸모없구나’라고 말할 건가요?
아닐 겁니다. ‘괜찮아? 많이 힘들었구나.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라고 말해줄 겁니다.
그 사람이 무언가를 해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그 사람 자체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해주어야 합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당신이 가진 능력이나 성과, 재산이나 직업으로 평가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걷어내고 남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유한 당신 자체가 소중한 겁니다.
‘해야 할 일’ 목록은 우리가 입는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 다른 옷을 입지만, 옷이 바뀐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죠.
오늘 멋진 옷을 입었다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내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 입고 벗는 역할과 과제일 뿐, 우리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과라는 익숙한 갑옷을 벗어 던지고, 아무것도 없는 맨몸의 나를 마주하는 일이니까요.
불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나를 누가 좋아해 줄까?’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은 당신이 해내는 일들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당신 스스로가 가장 먼저 믿어주어야 합니다.
오늘, ‘해야 할 일’ 목록 옆에 이렇게 한번 적어보세요. ‘이 모든 걸 하지 않아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숨 쉬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는 ‘일’이라는 단어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을 벌거나, 무언가 대단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일’이라고 여기죠.
그래서 숨 쉬고,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생존에 꼭 필요한 활동들은 ‘일’의 범주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잡아먹는 방해꾼처럼 취급할 때도 있죠.
하지만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어떤 대단한 일도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바탕이 되어주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들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오히려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할 최우선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부터 당신의 ‘해야 할 일’ 목록을 새롭게 작성해 보세요.
가장 첫 줄에 이렇게 쓰는 겁니다.
‘세 번 깊게 숨 쉬기.’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내쉬는 것. 이 간단한 행동이 긴장으로 굳어있던 우리 몸과 마음에 작은 틈을 만들어 줍니다.
그다음 목록은 ‘따뜻한 물 한 잔 천천히 마시기’입니다.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온전히 집중해 보세요.
‘점심시간에 밥 꼭꼭 씹어 먹기.’
‘퇴근길에 하늘 한번 올려다보기.’
‘잠들기 전에 내 몸 토닥여주기.’
어떤가요?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압박감을 주기보다, 오히려 편안함과 안정감을 줍니다.
이 목록을 하나씩 해낼 때마다, 우리는 죄책감이 아니라 나를 돌봤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일을 가장 뒷전으로 미뤄왔습니다.
마치 스마트폰 배터리가 1% 남을 때까지 충전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소모하기만 했죠.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나를 돌보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요.
나라는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바로 서 있어야, 다른 모든 일들도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당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당신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일 하나 해보기
머릿속이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터져버릴 것 같을 때, 우리는 종종 그 무게에 짓눌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합니다.
마치 눈앞에 거대한 산이 버티고 서 있는 기분이죠. 어디서부터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막막해서,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집니다.
이런 무기력의 늪에 빠졌을 때,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거창한 계획이나 대단한 결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사소하고, 심지어 우습게 보일 정도의 작은 일 하나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방 청소해야 하는데…’라는 거대한 생각에 짓눌려 있다면,
‘이불 위 베개 바로 놓기’ 딱 하나만 해보는 겁니다.
‘보고서 써야 하는데…’라는 압박감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다면,
‘노트북 켜서 새 문서 열고 제목만 쓰기’ 딱 거기까지만 해보는 거예요.
‘운동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몇 주째 헬스장 근처에도 못 가고 있다면,
‘현관문 열고 나가서 딱 1분만 걷고 들어오기’를 해보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완수’가 아니라 ‘시작’의 경험을 되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완벽한 성공’ 아니면 ‘완전한 실패’라는 흑백논리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수많은 과정이 존재합니다.
이 작은 행동들은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깝습니다.
베개를 바로 놓는 것, 제목을 쓰는 것, 1분 걷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죠.
이 작은 성공의 경험이 우리 뇌에 아주 중요한 신호를 보냅니다.
‘아,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 무기력하지 않구나.’
멈춰 있던 자전거의 페달을 아주 살짝 밟아주는 것과 같아요.
일단 페달이 한 바퀴 구르기 시작하면, 그다음 바퀴는 훨씬 적은 힘으로도 구를 수 있습니다.
작은 움직임이 다음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거죠.
이 작은 일을 하고 난 뒤에는, 스스로를 마음껏 칭찬해주세요.
‘베개를 바로 놓다니, 대단한데!’
‘1분이나 걷고 왔어. 정말 장하다!’
남들이 보기엔 우스울지 몰라도 괜찮아요. 이건 나 자신과의 약속이니까요.
압박감의 거대한 산을 정복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대신 발밑에 굴러다니는 가장 작은 조약돌 하나를 집어 드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그 작은 조약돌이,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어줄 겁니다.
‘이만하면 괜찮아’와 친구가 되는 연습
머릿속 알람이 그토록 시끄럽게 울리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안에 사는 완벽주의자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100점’짜리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
실수는 용납할 수 없고, 조금의 흠결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이 완벽주의는 우리를 끝없이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99점을 받아도, 나머지 1점을 채우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게 만들죠.
그래서 우리는 늘 불안하고, 만족을 모릅니다.
이제는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바로 ‘이만하면 괜찮아’입니다.
이 친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꼭 100점이 아니어도 괜찮아. 70점이나 80점도 충분히 훌륭해.’
‘실수 좀 하면 어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의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어.’
처음에는 이 친구의 말이 어색하고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너무 안일하고, 나태한 소리처럼 느껴질지도 몰라요.
‘이렇게 대충 해도 되나? 그러다 정말 뒤처지면 어떡하지?’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완벽주의자가 쉽게 물러나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겁니다.
괜찮아요. 처음에는 그저 ‘이만하면 괜찮아’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 하나를 깨뜨렸을 때. 예전 같으면 ‘나는 왜 이렇게 칠칠치 못할까’ 자책했겠지만, 이제는 이렇게 말해보는 겁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이만하면 괜찮아.’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오타를 하나 발견했을 때. 예전처럼 밤새 이불을 차며 괴로워하는 대신, ‘이 정도 실수는 괜찮아. 내용이 중요하니까.’라고 말해주는 거죠.
이 연습은 ‘대충 살자’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자책과 완벽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할 힘을 길러주는 과정입니다.
완벽을 추구하느라 소모했던 에너지를,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쓸 수 있게 되는 거죠.
‘이만하면 괜찮아’라는 말은, 우리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이자 허락입니다.
부족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겠다는 약속이에요.
이 새로운 친구와 조금씩 가까워져 보세요.
세상을 보는 당신의 눈이, 그리고 당신 자신을 보는 당신의 마음이 훨씬 더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질 겁니다.
알람이 멈춘 자리에 찾아오는 것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해야 한다’는 알람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처음에는 어색한 고요함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늘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면, 오히려 불안하고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 고요함에 조금씩 익숙해지면,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알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내 마음의 진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옵니다.
‘나 오늘 저녁에는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
‘한 시간쯤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고 싶다.’
‘저 친구에게 연락해서 보고 싶다고 말해야지.’
사소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작은 소망들이 고개를 듭니다.
우리는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여주고, 하나씩 들어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압박감에 짓눌려 좁아졌던 시야도 넓어집니다.
늘 앞만 보고, 혹은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의 등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됩니다.
길가에 핀 작은 들꽃이 눈에 들어오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뭇잎의 색깔을 발견하게 되고, 바쁘게 지나치던 사람들의 표정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세상이 훨씬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변화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다그치고 채찍질하던 엄격한 감독관의 자리에서 내려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다정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사랑스럽다고 말해줄 수 있게 됩니다.
알람이 멈춘 자리에 찾아오는 것은, 텅 빈 공허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진짜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 그리고 이 세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채워집니다.
물론, 알람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 거예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또다시 ‘해야 할 일’들에 둘러싸이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압니다.
언제든 그 알람의 볼륨을 줄일 수 있고, 잠시 코드를 뽑아둘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소음에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서 나의 길을 걸어가는 삶을요.
시끄러운 ‘해야 한다’는 소리가 당신을 괴롭힐 때마다, 이 글을 다시 찾아와 주세요. 괜찮아요. 그 소리는 당신을 해치지 못합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알람 소리보다 더 크고 강한, 고요함의 힘이 있으니까요.
그 힘을 믿어주세요. 당신의 속도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속도입니다. 천천히, 당신만의 걸음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정말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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