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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femental

원치 않는 조언과 오지랖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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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우 · · 27분 소요
원치 않는 조언과 오지랖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자세

문득 그런 날이 있어요. 애써 괜찮은 척하며 쌓아 올린 하루의 끝에, 툭 던져진 말 한마디가 마음의 둑을 무너뜨리는 날 말예요.

그 말은 보통 걱정이라는 따뜻한 옷을 입고 다가옵니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 다정한 목소리 뒤로, 날카로운 문장들이 따라옵니다. 내 삶을 멋대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말들 앞에서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표정으로 잠시 허공을 바라보게 돼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유로, 혹은 그저 먼저 살아봤다는 경험을 근거로 조언들이 쏟아집니다. 그 말들은 마치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나를 흠뻑 적십니다.

분명 나를 위한 말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점점 더 작아집니다. 내 모든 선택이 틀린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한구석에서는 ‘제발 그만하세요’라는 비명이 터져 나옵니다.

이유 모를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쏟아지는 말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기도 해요. 왜 나는 당당하게 내 생각을 말하지 못할까. 왜 나는 그들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어색하게 웃고만 있을까.

깊은 밤, 자책은 무력감이 되어 나를 잠식해요.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예요.

이 글은 바로 그런 당신을 위한 이야기예요. 당신의 마음이 유난히 여려서도, 당신이 유별나게 예민해서도 아닙니다. 원치 않는 조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던 당신의 마음을, 세상 가장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기 위해 이 글이 여기에 있어요. 당신의 답답함과 서운함, 그 억울함이 얼마나 당연한 감정인지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요.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들어오는 목소리들

우리 각자의 마음은 소중한 나만의 방과 같요. 그 방에는 내가 아끼는 생각들이 있고, 남들은 모르는 나의 꿈이 자라고 있어요. 때로는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상처와 슬픔이 가만히 놓여있기도 하죠.

이 방에 들어오려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주인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예의예요.

하지만 원치 않는 조언과 오지랖은 마치 예고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불청객과 같요.

불청객은 내 방에 성큼성큼 들어옵니다. 그리고 지적을 늘어놓기 시작하죠. 가구 배치가 이게 뭐냐고, 벽지 색깔은 왜 그 모양이냐고, 창문은 왜 더 크게 내지 않았냐고 말예요.

나름의 이유와 취향으로 정성껏 꾸민 나의 공간인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잘못된 선택처럼 되어버립니다.

그 목소리들은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혹시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고.” “이것도 다 경험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런 말들로 안전장치를 걸어둔 채, 그들은 안심하고 자신의 생각들을 쏟아냅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에 ‘나’는 없다는 것예요. 그들의 경험, 그들의 기준, 그들의 가치관만이 존재할 뿐예요.

내 상황이 어떤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고민 끝에 지금의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는 빠져 있어요. 그들은 마치 정답이 정해진 수학 문제를 풀듯, 내 인생의 해답을 너무나 쉽게 단정 짓요.

그럴 때 우리는 깊은 혼란에 빠집니다. ‘혹시 내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저 사람의 말이 맞는 건 아닐까? 내 판단력에 문제가 있나?’

수많은 목소리가 내 마음의 방을 가득 채우면, 정작 가장 중요하게 들어야 할 내 자신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들리지 않게 돼요.

단순히 기분이 나쁜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의 고유성과 주체성이 흔들리는 경험예요. 내 삶의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듯한 무력감을 느끼게 돼요.

그들은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지만, 그 결과는 종종 내 마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침입’이 되곤 해요.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나고, 억울하고, 동시에 슬퍼지는 것예요. 나의 소중한 공간이 존중받지 못했다는 서운함 때문예요. 문을 두드리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이, 타인의 기준이 내 삶의 중심을 뒤흔들 때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요.

당신이 느꼈던 그 불편함과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내 마음의 신호예요. 내 공간이 침범당했으니, 주인을 지키기 위해 경보를 울리는 것이죠.

그러니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아주 잘 지키고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고마운데, 참 고맙지가 않네요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 말처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말이 또 있을까요. 그 말 앞에서는 화를 내기도, 온전히 고마워하기도 애매해집니다.

분명 상대방의 얼굴에는 나를 걱정하는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요. 그들의 눈빛은 ‘나는 네 편이야’라고 말하는 듯해요.

하지만 그 진심이라는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어보면, 그 안에는 나를 할퀴는 날카로운 말들이 들어있어요.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예요. 상대방의 ‘좋은 의도’와 그 말이 나에게 주는 ‘상처’ 사이에서 길을 잃는 것이죠.

의도는 고맙지만, 결과는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게 돼요.

‘고마워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저 사람은 나를 위해 저렇게 애쓰는데, 내가 너무 예민한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결국 모든 화살은 나 자신에게로 향해요.

상대방의 조언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속 좁은 사람으로, 배려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치 맛이 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과 같요. 만들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억지로 삼키지만, 속은 점점 더부룩해지고 결국에는 체하고 맙니다.

우리는 그들의 ‘성의’와 ‘진심’이라는 마법의 단어 앞에 너무나 자주 무장해제돼요. 그들의 의도가 선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데도 말예요.

선한 의도가 항상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물은 더러운 것을 소독하는 데 쓰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피부에 닿으면 심각한 화상을 입힐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죠.

상대방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했더라도, 그 말이 나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나는 아프다고 말할 권리가 있어요. 고맙지 않은 것을 억지로 고맙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요.

그 복잡한 감정, 즉 고마움과 서운함이 뒤섞인 그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해요. “아, 그분의 마음은 고맙지만, 그 표현 방식은 나에게 상처가 되는구나.” 이렇게 내 마음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해요.

의도와 결과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나를 탓하던 마음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상대방의 마음은 그대로 존중하되, 그 말이 내 마음에 남긴 상처는 온전히 내 편이 되어 돌봐주어야 해요.

당신이 느꼈던 그 이중적인 감정은 지극히 정상예요. 오히려 당신이 상대방의 마음까지 헤아리려 애썼다는 증거이며, 그만큼 당신이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해요.

그러니 더는 자책하지 마세요. 고맙지 않을 때는, 고맙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솔직하게 인정해도 괜찮요.

그 말은 왜 유독 날카로운 유리조각 같을까

똑같은 말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심장을 찌르는 유리조각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특히 원치 않는 조언이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말이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예요. 그 조언들은 대부분 내가 이미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더 아픈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요.

예를 들어, 취업 준비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놀고만 있을 거냐”는 말은 그저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 말 속에는 ‘너는 지금 노력을 안 하고 있다’, ‘너는 무능력하다’는 보이지 않는 비난이 숨어 있어요.

이미 스스로를 수백 번도 더 다그치고 자책하며 힘겨운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노력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게 돼요.

다이어트로 고군분투하는 사람에게 “살 좀 빼야겠다”는 말 한마디는,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잔인한 낙인과 같요.

그 조언들은 종종 나의 ‘결과’만을 놓고 평가해요. 내가 그 결과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웠는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켰는지, 어떤 고민과 노력을 거쳐왔는지 그 과정은 모두 지워져 버립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으로 너무나 쉽게 충고를 던집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듣는 사람의 지나온 시간 전체를 무시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해요.

더 아픈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나와 가깝다고 믿었던 사람들이라는 점예요.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이나 친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때, 우리의 상처는 배가 돼요.

단순한 말을 넘어, 관계에 대한 배신감과 깊은 외로움을 느끼게 해요.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몰라줘도, 이 사람만은 나를 믿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죠.

그래서 우리는 말의 내용보다도 그 말에 담긴 ‘인정해주지 않는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받요. “너의 힘듦을 안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따뜻한 공감 대신, “너는 부족하다”, “이렇게 해봐라”는 차가운 해결책만이 돌아올 때, 우리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끼게 돼요.

그 조언이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 말이 당신의 노력과 시간을, 당신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예요. 당신이 흘린 땀과 눈물을 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함부로 판단했기 때문예요.

그러니 아픈 것이 당연해요. 베인 상처는 아픈 것이 당연하듯, 당신의 마음도 당연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예요.

걱정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외투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원치 않는 조언을 멈추지 않는 걸까요? 정말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요?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요. 오히려 그들의 행동 뒤에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요.

그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이 겪는 상황이 위태로워 보이고, 당신이 잘못된 길로 갈까 봐 불안해해요. 그 불안을 해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당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길로 이끌려고 하는 것예요.

즉, 그들의 조언은 사실 당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신을 보며 불안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행동에 가깝요.

마치 아이가 물가에서 노는 것을 보고 불안해진 부모가 아이에게 “위험해! 나오라니까!”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요. 아이의 즐거움보다는 부모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 우선이 되는 것이죠.

그들의 조언은 ‘걱정’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외투와 같요. 자신들은 당신이 추울까 봐 덮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당신은 그 무게에 짓눌려 움직이기조차 힘들어집니다.

심지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나에게, 겨울 외투를 억지로 입히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내 상황과 계절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만을 강요하는 것예요.

또 다른 이유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일 수 있어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 현명하고 경험 많은 존재로 인정받고 싶을 때, 사람들은 조언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해요.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마치 자신이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 듯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죠.

이런 경우, 그들은 당신의 진짜 감정이나 생각에는 큰 관심이 없요. 오직 자신의 해결책이 채택되는 것에만 집중해요.

이처럼 대부분의 원치 않는 조언은 그 사람의 내면적인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어요. 그들의 불안, 그들의 결핍, 그들의 과거 경험이 투영된 결과물인 셈예요.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의 말을 내 문제로 가져와 자책하는 대신, ‘아, 저 사람이 지금 불안하구나’, ‘저 사람은 인정받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돼요.

그들의 무례한 행동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의 무게에서 나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예요. 그들의 조언이 사실은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말에 휘둘리지 않을 힘을 얻게 돼요.

그 무거운 외투를 억지로 입고 있을 필요가 없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 지금은 덥네요.”라고 말하고 그 외투를 정중히 벗어둘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요.

내 마음의 정원에 울타리를 세우는 일

상대방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는 계속해서 침범당하는 내 마음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내 마음을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이 정원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요. 그런데 울타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나 들어와 꽃을 밟고, 나무를 꺾고, 쓰레기를 버리고 갈지도 모릅니다.

원치 않는 조언과 오지랖은 바로 이 울타리 없는 정원을 마구 짓밟는 발걸음과 같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심리적 경계’, 즉 마음의 울타리를 세우는 일이 반드시 필요해요.

울타리를 세운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담을 쌓고 관계를 끊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건강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존중해야 할 최소한의 거리를 만드는 것예요.

울타리는 ‘여기는 나의 공간이고, 이 안에서는 나의 규칙이 적용돼요. 나에게 들어오려면 나의 허락을 구해주세요.’라는 명확한 안내판과 같요.

울타리를 세우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이유는, 그렇게 하면 내가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처럼 보일까 봐 두렵기 때문예요. 특히 우리는 어릴 때부터 거절하는 것을 무례한 행동이라고 배워왔요.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 착한 것이라고요.

하지만 나의 마음을 지키는 일은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비행기에서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남을 돕기 전에 내 산소마스크부터 먼저 쓰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내가 먼저 바로 서야, 다른 사람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내 정원이 망가진 상태에서는 누구에게도 아름다운 꽃을 보여줄 수 없고, 시원한 그늘을 내어줄 수도 없요.

마음의 울타리는 하루아침에 튼튼하게 세워지지 않요. 처음에는 아주 낮고 허술한 울타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요. 작은 팻말 하나를 세우는 것부터 시작하면 돼요.

예를 들어, 누군가 나의 외모에 대해 함부로 평가할 때, 예전처럼 그냥 웃어넘기는 대신, “저는 제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라고 조용히 말하는 것예요. 이 작은 말 한마디가 바로 내 정원에 세우는 첫 번째 팻말예요.

상대방의 조언을 무조건 수용하는 대신,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제 방식대로 한번 해볼게요.”라고 말하는 것도 훌륭한 울타리가 될 수 있어요.

이 과정에서 상대방이 서운해하거나 화를 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기억해야 해요. 건강한 관계는 나의 울타리를 존중해주는 관계예요.

나의 울타리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넘으려고 하는 사람은, 애초에 내 정원을 아껴줄 마음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내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주인은 오직 나 자신예요. 어떤 꽃을 심고, 어떤 나무를 키울지는 내가 결정해요. 그 아름다운 정원을 지키기 위해, 오늘부터 용기를 내어 작은 울타리를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지만 단단한 말

마음의 울타리를 세우기로 결심했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될 것예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나의 경계를 분명히 전달하는 것, 핵심예요.

여기에는 공격이 아닌 ‘방어’의 기술이 필요해요. 부드럽지만 단단한 말들이죠.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원칙은 ‘나’를 주어로 말하는 것예요. “당신은 왜 그렇게 말해요?” 라고 비난하는 대신, “저는 그렇게 들으니 마음이 좀 힘드네요.” 라고 나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예요.

상대방을 공격하는 순간, 그 사람은 방어적인 태세를 갖추고 더 큰 공격으로 맞서올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상대방도 잠시 멈춰서 자신의 말을 돌아볼 여지를 갖게 돼요.

두 번째 기술은 ‘인정하고 선 긋기’예요. 상대방의 좋은 의도를 먼저 인정해 주는 것예요. “저를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면, 상대방은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그런 다음, 부드럽게 나의 경계를 이야기하는 것예요. “하지만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결정하고 싶어요.” 감사함의 표현이 쿠션 역할을 해주어, 뒤따르는 거절의 말이 훨씬 부드럽게 전달될 수 있어요.

세 번째는 ‘화제 전환하기’예요. 불편한 조언이 계속될 때, 굳이 그 주제로 싸울 필요는 없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혹시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그 드라마 보셨어요?” 와 같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예요. 갈등을 피하면서 상황을 마무리하는 아주 현명한 방법예요.

네 번째는 ‘생각할 시간 벌기’예요. 즉답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것예요. “좋은 말씀 감사해요. 제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볼게요.” 라고 말하며 대화를 일단락 짓는 것예요. 이 말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그 자리에서 바로 동의하거나 반박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줍니다. 그리고 그 조언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나중에 혼자 조용히 결정하면 돼요.

마지막으로, 때로는 ‘침묵과 미소’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어요. 모든 말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는 없요. 그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듣고만 있는 것예요. 더 이상 나의 반응이라는 먹이를 주지 않으면, 상대방도 제풀에 지쳐 조언을 멈추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말들이 처음에는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을 수 있어요. 어색하고, 말하고 나서도 마음이 불편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한 번, 두 번 연습하다 보면 점점 자연스러워질 것예요.

이 말들은 단순히 상대방을 막아내는 기술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예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지만 단단한 말로, 소중한 나를 지켜주세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경계를 설정하고, 거절의 말을 연습하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감정이 있어요. 바로 ‘미안함’과 ‘죄책감’예요.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했다는 사실 때문에, 혹시 그 사람이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나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내 책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내가 거절해서 상대방이 서운함을 느꼈다면, 온전히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나의 감정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상대방의 감정의 주인은 상대방예요. 나의 정중한 거절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의 몫이지, 나의 책임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배려해야 해요. 하지만 나의 마음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경계를 지키는 것은 나의 권리이며,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는 없요.

오히려 나의 경계를 존중해주지 않고 계속해서 침범하려 했던 상대방이 미안해해야 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죄책감을 느낄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나는 무례하게 행동했는가?’ 만약 당신이 부드럽고 정중한 방식으로 당신의 의사를 표현했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요.

‘착한 사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해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은 결국 나 자신을 잃게 만듭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는 가장 나쁜 사람일 수 있어요. 나의 솔직한 감정과 욕구를 매번 억누르고,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야 하기 때문예요.

때로는 누군가에게 ‘조금은 불편한 사람’이 될 용기가 필요해요. 나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사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나를 더 존중받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관계는 더 건강하고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요. 진정으로 나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나의 경계 설정을 이해하고 존중해 줄 것예요. 오히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어. 말해줘서 고마워.”라고 반응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나의 거절에 대해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비난한다면, 그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나를 좋아했던 것일 수 있어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내뱉은 말들은, 당신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사랑의 표현예요.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세요.

내 삶의 운전대는 내가 잡고 있어요

원치 않는 조언들이 우리를 특히 더 힘들게 하는 이유는, 은연중에 내 삶의 주도권을 빼앗아가기 때문예요.

조언을 하는 사람은 운전석에 앉은 나에게 다가와, “이 길이 아니야, 저쪽으로 가야 해. 운전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라며 멋대로 내비게이션을 조작하고 운전대를 꺾으려고 해요.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는 점점 조수석으로 밀려나는 기분을 느끼게 돼요. 내 인생인데, 왜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지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해요. 내 삶이라는 자동차의 운전대는 오직 나만이 잡을 수 있고, 또 잡아야만 해요.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경험과 지도를 가지고 있어요. 그들의 지도가 어떤 경우에는 유용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지도는 그들의 목적지에 맞춰 그려진 것이지, 나의 목적지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들이 알려준 길이 더 빠르고 편한 길일지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 목적지로 향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조금 돌아가더라도,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내가 선택한 길을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어요.

길을 잘못 들어서 마주하게 된 멋진 풍경,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만남, 위기를 극복하며 얻게 된 운전 실력. 이 모든 것이 나만의 소중한 이야기가 되고, 나를 성장시키는 자산이 돼요. 타인이 시키는 대로만 운전해서는 결코 이런 경험들을 할 수 없요.

다른 사람의 조언을 참고는 하되, 최종 결정은 반드시 내가 내려야 해요.

수많은 목소리들 속에서 길을 잃을 것 같을 때, 잠시 차를 멈추고 시동을 끈 채,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나는 정말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나는 어떤 풍경을 보고 싶은 걸까?’

내 안의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예요. 처음에는 그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외부의 소음이 너무 커서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의식적으로 계속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고 단단해질 것예요.

내 삶의 운전대를 내가 잡고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닙니다. 실수할 수 있는 자유, 실패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예요.

설령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나의’ 선택이었기에 우리는 그 결과에 온전히 책임질 수 있고, 그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어요. 하지만 타인의 선택을 따른 결과가 나빴을 때는, 원망과 후회만이 남게 돼요.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릴 때마다,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는 상상을 해보세요.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정하게 말해주세요. “괜찮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내가 책임질게.”

당신은 당신 인생의 유일하고 가장 훌륭한 운전자예요.

불편한 선물 상자를 여는 용기

원치 않는 조언은 때로는 ‘불편한 선물 상자’와 같요. 받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손에 쥐여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선물이죠.

우리는 이 선물을 받자마자 버려버릴 수도 있고, 방구석에 던져두고 외면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때로는 그 불편한 선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볼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어요.

물론 그 안에는 나에게 상처만 주는 쓸모없는 물건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수많은 돌멩이들 사이에서 빛나는 작은 보석 하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물을 여는 주체가 ‘나’라는 것예요. 누군가 억지로 열라고 해서 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나의 주도하에 상자를 열어보는 것예요.

모든 조언을 무조건 차단하고 거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수 있어요. 때로는 내가 보지 못하는 나의 맹점을 다른 사람이 발견해 줄 수도 있고, 내 생각의 틀을 깨는 신선한 관점을 제시해 줄 수도 있기 때문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수많은 돌멩이와 보석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기준은 ‘나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는지 살펴보는 것예요. 그 조언이 나라는 사람의 상황과 감정을 충분히 고려하고, 나의 선택을 존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한번 귀 기울여볼 만한 가치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의 인격을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말이라면, 보석이 아닌 돌멩이에 불과해요.

두 번째 기준은 그 조언을 들었을 때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보는 것예요. 듣기에는 썼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조언이 있어요. 마치 몸에 좋은 쓴 약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저 나를 위축시키고, 내 자신감을 깎아내리는 말이라면, 성장이 아닌 독이 될 뿐예요.

선물 상자를 열어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별력’과 ‘주체성’예요. 상대방의 말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부분과 버려야 할 부분을 스스로 판단하고 걸러내는 것예요.

마치 체로 금을 거르듯, 조언이라는 흙더미 속에서 나에게 정말 필요한 지혜의 금가루만을 골라내는 작업예요.

매우 고도의 정신적 활동이며, 내면의 힘이 강해야만 가능해요. 그러니 아직 마음의 힘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억지로 불편한 선물 상자를 열어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요. 일단은 내 마음을 지키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예요.

하지만 언젠가 당신의 마음이 충분히 단단해졌을 때, 불편한 조언이라는 선물 상자를 한번 열어볼 용기를 내어보세요. 그 안에서 발견한 작은 보석 하나가, 당신의 인생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 줄지도 모릅니다.

오직 내게만 들리는 응원의 목소리

세상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어요. 나를 향한 걱정의 목소리, 비난의 목소리, 평가의 목소리. 이 외부의 소리들이 너무 클 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소리를 놓치고 맙니다. 바로 내 안에서 울리는 나 자신의 목소리예요.

다른 사람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느라, 정작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내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들여다보는 것을 잊고 살지는 않았나요?

이제 외부로 향해 있던 귀를 부드럽게 안으로 돌려,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시간예요.

그곳에는 세상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존재가 살고 있어요.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모든 순간을 함께했고, 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기억하는 존재. 바로 나 자신예요.

그 목소리는 때로는 아주 작고 희미하게 들릴 수 있어요.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조금 쉬어가도 괜찮아.”, “네 선택을 믿어봐.” 이 다정한 응원의 목소리가 바로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가장 단단한 동아줄예요.

다른 사람들은 내 인생의 특정 단면만을 보고 섣불리 조언하지만, 오직 나만이 내 인생의 전체 맥락을 알고 있어요.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어떤 상처를 극복했는지, 어떤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예요.

그렇기에 내 삶의 가장 훌륭한 전문가는, 유명한 컨설턴트나 인생 선배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일 수밖에 없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서 나의 가치를 찾으려고 애쓰는 대신,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것이 중요해요.

매일 밤 잠들기 전, 오늘 하루 애쓴 나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 “오늘도 정말 고생 많았어. 네가 얼마나 애썼는지 나는 다 알아.”

실수하고 넘어진 날에는 자책 대신 위로를 건네주세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면 돼. 나는 너를 믿어.”

이처럼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정한 말들이 쌓이고 쌓여, 내 안에 단단한 지지대를 만들어줍니다. 이 지지대가 튼튼하게 서 있으면, 외부에서 어떤 비바람이 불어와도 쉽게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요.

다른 사람의 말이 더 이상 나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러 의견 중 하나로 느껴지게 돼요.

이제 세상의 소음은 조금 줄이고, 내 마음의 소리를 가장 크게 들어주세요. 그 어떤 전문가의 조언보다,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오직 내게만 들리는 그 응원의 목소리가 당신을 가장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것예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이미 모든 답이 있어요.

수많은 소음 속에서 나를 지키는 일은,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에 가깝요. 불필요한 소음은 적절히 차단하고, 내가 귀 기울이고 싶은 소리만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니까요.

마치 나만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같요. 다른 사람의 채널에 내 주파수를 맞추느라 지지직거리는 소음을 견디는 대신, 온전히 나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맑고 깨끗한 채널에 머무는 것예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당신만의 고유한 주파수가 있어요. 그 주파수에서는 당신을 향한 따뜻한 응원과 지지가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가끔 길을 잃고 헤맬 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정답처럼 느껴질 때, 잠시 모든 것을 멈추세요. 그리고 당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당신의 숨결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그곳에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가장 정확한 나침반이 있어요.

당신의 걸음은 당신의 것이기에, 그 자체로 이미 정답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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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우

건강한 거리두기를 연구하는 관계 전문가.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심플하고 현명하게 푸는 법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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