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다짐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눈을 뜹니다.
창문 너머 들어오는 2025년 9월의 아침 햇살은 유난히 맑고 투명합니다.
‘이제 정말 달라져야지.’
마음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던 그 말을 다시 한번 꺼내 봅니다.
책상 위에 쌓아둔 책을 펴려 할 때.
굳게 마음먹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려 할 때.
혹은 용기를 내어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오랫동안 미뤄왔던 일에 손을 대려는 바로 그 찰나.
아주 익숙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조용히 말을 겁니다.
‘그래 봤자 안될 거야.’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갑니다.
방금 전까지 반짝이던 의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깨는 천근만근 무거워집니다.
마치 누군가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이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이게 내 생각인지, 아니면 세상의 당연한 이치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세상에 나만큼 내 실패를 정확히 예측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옳아 보이니까요.
결국 당신은 시작도 하기 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역시 나는 안되는구나.’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미 실패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이 답답하고 끝없는 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요.
그 목소리가 또 말을 걸어옵니다
그 목소리는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아침,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
어느 날 오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어느 날 밤, 내일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려 할 때.
마음 가장 깊고 부드러운 곳을 파고드는 속삭임입니다.
“애쓰지 마. 어차피 똑같을 텐데.”
“너만 모르는 거 아니야? 다들 넌 안될 거라고 생각해.”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기억 안 나?”
이 목소리는 나를 너무나 잘 압니다.
나의 가장 아픈 기억을 알고 있고,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날아와 마음에 박힙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 약점들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마치 나의 모든 실패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증인처럼 말입니다.
그 목소리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무력해집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 말을 전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맞아, 나는 그랬지. 나는 항상 실패했지.’
그 목소리는 나를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합니다.
“괜히 상처만 받을 거야. 그냥 가만히 있어. 그게 널 지키는 길이야.”
그래서 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를 위하는 척 다가오는 그 목소리에게서.
나를 실패의 구렁텅이에 가두려는 그 목소리에게서.
어느 순간에는 나를 보호하려는 유일한 존재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 목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왜 내 안에서 나를 이토록 흔드는 걸까요.
왜 이 목소리는 나를 떠나지 않을까요
이 목소리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내 안에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어진 작은 집과 같습니다.
그 집을 짓는 데 사용된 재료는 바로 ‘과거의 상처’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모든 일에 자신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틀릴 것이 무서워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걸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살면서 수많은 실패와 마주합니다.
야심 차게 도전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던 기억.
최선을 다했지만 비웃음만 돌아왔던 순간.
믿었던 사람에게서 “넌 역시 안돼”라는 말을 들었던 아픔.
이런 경험들이 하나둘씩 쌓여 마음속에 상처의 벽돌이 됩니다.
실패는 아픕니다. 실망은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마음은 본능적으로 그 아픔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상처를 받지 않게 나를 지켜야겠다’는 방어막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 방어막이 바로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입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나에게, “거기 가면 또 아플지 몰라. 위험해. 가지 마.”라고 말하며 앞을 가로막는 겁니다.
나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현재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보호자인 셈입니다.
그러니 그 목소리가 들릴 때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할까’ 자책하지 마세요.
그 목소리는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견뎌왔는지 보여주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제는 그 목소리의 진짜 의미를 알아줄 때입니다.
기억의 무게가 어깨를 누를 때
우리 마음은 아주 꼼꼼한 기록 저장소와 같습니다.
좋았던 기억보다 아팠던 기억을 훨씬 더 선명하게 저장해 둡니다.
미래에 비슷한 위험을 피하게 하려는 마음의 생존 본능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마음은 과거의 기록들을 빠르게 검색합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실패했던 적이 있던가?’
그러면 수많은 실패의 기록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밤새워 준비했지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발표.
큰맘 먹고 시작했지만 금방 포기해버린 운동.
용기 내어 고백했지만 거절당했던 마음.
이 기억들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생생한 감정을 동반합니다.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 좌절감, 무력감이 지금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습니다.
마치 지금 다시 그 일을 겪는 것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습니다.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는 이 과거의 감정들을 먹고 자랍니다.
실패의 기억이 많을수록 그 목소리는 더 크고 단단해집니다.
“봐, 그때도 그랬잖아. 이번이라고 다를 것 같아?”
이 말은 너무나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서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
과거의 실패는 명백한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실패를 겪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게 아닙니다.
넘어지면서 어떻게 하면 덜 아프게 넘어지는지 배웠고, 실패하면서 그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모든 경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지혜와 노하우로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기억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지 마세요.
그 기억은 나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 안내판입니다.
그 안내판을 읽고, 어제와는 조금 다른 길로 나아가면 됩니다.
세상은 완벽한 사람들만 보여주니까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봅니다.
SNS 속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입니다.
멋진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 끝에 눈부신 성공을 이룬 이야기만 들려줍니다.
세상은 온통 성공과 성취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빛나는 모습과 비교하면, 내 모습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잘나가고 있구나.’
이런 생각은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줍니다.
“저 사람들을 봐. 넌 저렇게 될 수 없어. 시작부터가 다르잖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반짝이는 ‘결과’만 봅니다.
그들이 그 결과를 얻기까지 겪었을 수많은 실패와 좌절의 ‘과정’은 보지 못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실패를 대대적으로 광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처럼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완벽해 보이는 저 사람도, 사실은 수없이 넘어졌을지 모릅니다.
밤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될까’ 자책했을지도 모릅니다.
‘포기할까’ 수백 번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완벽함에 속지 마세요.
그것은 세상의 아주 작은 단면일 뿐입니다.
당신의 서투름과 불완전함은 흠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 열심히 길을 가고 있다는 가장 자연스러운 증거입니다.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면, 평생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조금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가 당신의 가장 솔직한 시작점입니다.
낡고 해진 보호막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는 한때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었습니다.
더는 상처받지 않도록, 더는 실망하지 않도록 나를 감싸주던 갑옷이었습니다.
그 갑옷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상처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도전하지 않았기에 실패의 쓴맛을 보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의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꽤 효과적인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갑옷은 너무 무거워졌습니다.
너무 단단해져서 이제는 내 몸에 맞지 않습니다.
외부의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지만, 동시에 세상의 즐거움과 새로운 가능성까지 차단해 버립니다.
이 갑옷을 입고서는 마음껏 뛸 수도, 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안전한 곳에 웅크리고 있을 뿐입니다.
보호막은 어느새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어버렸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쁨.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설렘.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의 성취감.
이 모든 소중한 것들을 갑옷 밖의 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제는 갑옷이 너무 무거워서 숨쉬기조차 버겁습니다.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나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이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 더 이상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서서히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낍니다.
이제 그만 이 낡고 무거운 갑옷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물론 갑옷을 벗으면 상처 입을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고, 넘어지면 아플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따스한 햇살을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상쾌한 바람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상처 입을 용기, 그것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낡은 보호막에게 이제 작별을 고할 시간입니다.
그 목소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기
우리는 보통 그 목소리가 들리면 억지로 무시하거나, 싸우려고 합니다.
“아니야! 이번엔 할 수 있어!”라고 소리치거나, “제발 좀 조용히 해!”라며 귀를 막아버립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목소리는 더 커지고 끈질기게 우리를 붙잡습니다.
마치 관심을 달라고 떼쓰는 아이처럼 말입니다.
이제 방법을 조금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싸우는 대신, 한번 다정하게 말을 걸어보는 겁니다.
그 목소리를 내 안의 또 다른 나, ‘걱정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 조용히 물어보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네가 많이 걱정되는구나.”
“뭐가 그렇게 불안하니? 나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어?”
“네가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은 어떤 모습이야?”
비난하거나 맞서 싸우는 대신, 그저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겁니다.
아마 ‘걱정이 많은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할 겁니다.
“지난번에 그렇게 노력했는데 사람들이 비웃었잖아. 이번에도 그럴까 봐 무서워.”
“만약 실패하면, 나는 정말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단 말이야.”
“이것마저 실패하면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을 것 같아. 그래서 두려워.”
가만히 듣고 보니, 그 목소리는 나를 좌절시키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너무나 두려웠던 겁니다.
과거의 아픔이 반복될까 봐, 나라는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까 봐, 온 힘을 다해 나를 막아서고 있었던 겁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고, 따뜻하게 다독여 주세요.
“그랬구나. 그런 상처가 있었구나. 정말 아팠겠다.”
“나를 지켜주려고 그렇게 애썼구나. 정말 고마워.”
“네가 걱정하는 마음, 이제 내가 알아줄게.”
내 안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공감해 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가신 소음 같았던 그 목소리는 힘을 잃고 잠잠해지기 시작합니다.
나와 싸우던 적이, 나와 함께 가는 친구가 되는 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첫걸음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창한 성공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소리가 비웃을 수 없을 만큼 아주아주 작은 일을 그냥 해버리는 겁니다.
목표를 산 정상에 두지 마세요.
그냥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딱 한 걸음만 옮기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책 한 권을 다 읽는 것이 목표라면,
지금 당장 책상에 앉아 책의 첫 문장만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겁니다.
살을 10킬로그램 빼는 것이 목표라면,
지금 바로 일어나서 딱 1분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겁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다면,
단어 하나만 공책에 적어보는 겁니다.
이런 작은 행동 앞에서는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도 할 말을 잃습니다.
“고작 1분 걷는다고 살이 빠지겠어?”라고 비아냥거릴 수는 있겠지만, ‘1분 걷기’ 자체를 실패하기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작하기 전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모든 실패의 가능성을 계산합니다.
그러는 동안 에너지는 모두 소진되고, 두려움은 점점 커집니다.
결국 시작도 못 하고 지쳐버립니다.
생각을 멈추고, 몸을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아주 작은 행동이, 거대한 두려움의 댐에 균열을 내는 첫 번째 망치질입니다.
한 걸음을 내디디면, 그 다음 한 걸음은 조금 더 쉬워집니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쌓이면, ‘어쩌면 될지도 몰라’라는 새로운 목소리가 아주 작게 싹트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바꾸는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사소하고 작은 움직임입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무엇인가요?
그것부터 그냥 한번 해보는 겁니다.
반짝이는 조약돌을 줍는 마음으로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면 ‘완벽한 성공’,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끔찍한 실패’라고 단정 짓습니다.
마치 100점 아니면 0점인 흑백 논리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듭니다.
과정이 아무리 훌륭했더라도,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실패’가 되어버리니까요.
이제 관점을 조금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하루를 살면서 내가 해낸 아주 작은 긍정적인 일들을 ‘반짝이는 조약돌’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씩 줍는 겁니다.
아침에 5분 일찍 일어났다면, 조약돌 하나.
미루던 메일에 답장을 보냈다면, 조약돌 하나.
하기 싫은 설거지를 해치웠다면, 조약돌 하나.
산책하며 파란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면, 그것도 예쁜 조약돌 하나.
이 조약돌들은 너무 작고 사소해서,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이것들을 줍기 시작하면, 하루가 꽤 달라 보입니다.
하루가 끝날 무렵, 내 손에 쥐어진 조약돌들을 바라보세요.
비록 오늘 거창한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을지라도, 나는 이렇게 많은 반짝이는 순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라는 생각 대신, ‘오늘도 나는 꽤 많은 일을 해냈구나’라는 작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효능감’이라는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가장 좋은 훈련입니다.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는 나의 가치를 오직 ‘결과’로만 판단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정’ 속에서 반짝이는 조약돌을 주우며, 나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실패는 더 이상 끔찍한 괴물이 아닙니다.
그저 목표했던 조약돌을 줍지 못한 것일 뿐, 그 과정에서 나는 다른 예쁜 조약돌들을 이미 많이 주웠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 당신은 어떤 조약돌을 주웠나요?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그 돌들을 소중하게 모아보세요.
어느새 당신의 주머니는 세상의 어떤 보석보다 빛나는 희망으로 가득 찰 겁니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기
우리가 무언가를 시작하기 두려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실패하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나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낙인처럼 느껴집니다.
실패하면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고 손가락질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라는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길을 택합니다.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는 바로 이 두려움을 이용합니다.
“실패해서 망신당하느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게 현명한 거야.”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실패가 정말 인생의 끝일까요?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실패를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공으로 가는 과정의 일부, 꼭 필요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자전거를 배울 수 없습니다.
틀리는 것을 무서워하면 새로운 언어를 말할 수 없습니다.
실패는 ‘나는 안되는 사람이야’라는 증거가 아니라, ‘이 방법은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알려주는 소중한 정보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실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스스로에게 실패할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실패했을 때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도전하기 전에 미리 스스로에게 말해주세요.
“이번에 한번 해보자. 그런데 혹시 잘 안되더라도 괜찮아.”
“결과가 어떻든, 용기를 낸 것만으로도 나는 정말 대단한 거야.”
“실패는 그냥 경험일 뿐이야. 이걸 통해 분명 무언가 배우게 될 거야.”
스스로에게 ‘실패해도 괜찮다’는 면죄부를 주는 겁니다.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과정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그 일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우리는 실패보다 훨씬 더 큰 존재입니다.
한두 번의 실패가 우리 존재의 가치를 절대로 깎아내릴 수 없습니다.
나의 그림자와 함께 걷는 법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를 완전히 없애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그 목소리는 내 안의 오랜 상처와 두려움이 만들어낸 나의 일부, 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를 없애려고 싸울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선명해집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두운 방에 빛을 들여오면 그림자는 자연스럽게 옅어지듯이 말입니다.
이제 그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일단 멈춰 서서 그 목소리를 알아차려 줍니다.
“아, 내 안의 걱정 많은 친구가 또 왔구나.”
그리고 그 목소리가 하는 이야기를 그냥 들어줍니다.
“그래, 실패할까 봐 정말 무섭구나.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는구나.”
그다음, 그 친구에게 다정하게 말해주는 겁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를 지켜주려는 마음인 거 알아.”
“하지만 괜찮아. 이번에는 내가 아주 작은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한번 가보려고 해.”
“넘어지더라도 괜찮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너는 그냥 옆에서 내가 잘 가는지 지켜봐 주면 돼.”
그림자를 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길을 가는 동반자로 대하는 겁니다.
나의 두려움을 억누르는 대신, 그 두려움을 안고 한 걸음 나아가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큰 차이를 만듭니다.
내면의 싸움에 쓰던 에너지를, 앞으로 나아가는 데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아마 평생 우리를 따라다닐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빛을 향해 걸어가는 한,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등 뒤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 안의 그림자와 조용히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면 됩니다.
차가운 9월의 바람이 스치고, 어느덧 창밖은 어둑해졌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와 하루 종일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몇 번을 이기고, 또 몇 번을 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많이 지쳐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싸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입니다.
그 목소리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버티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마음속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 씨앗이 거대한 나무가 될지, 예쁜 꽃을 피울지,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못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 봤자 안될 거야’라는 목소리는 말합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싹이 틀 리가 없어. 괜한 힘 빼지 마.”
하지만 우리는 그냥, 오늘 하루치만큼의 물을 조용히 부어줄 수 있습니다.
싹이 틀지 안 틀지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우리는 그저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 따스한 마음으로 씨앗을 돌보는 그 일에만 집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의 그 작은 행동이, 당신 자신도 몰랐던 거대한 가능성의 싹을 틔울지도 모릅니다.
결과가 어떻든, 씨앗에게 물을 주려고 허리를 굽힌 당신의 그 다정한 마음과 용기 있는 행동은, 그 자체로 이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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